2018년 4월 16일은 세월호 참사 4주기를 맞는 참으로 가슴 아픈 날이다. 4년 전 우리는 꽃같이 아름다운 우리 아이들을 그렇게 허무하게 떠나보냈다. 합동분향소를 방문했던 4년 전 그날이 아직도 너무도 선명하게 생각난다. 그 압도적 슬픔 앞에서, 감히 헤아려보지도 표현하지도 못할 그 아픔 앞에서 그저 부들부들 떨면서 울기만 했던, 앞으로도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은 그 날 그 순간 그리고 우리 아이들. 또다시 먹먹한 슬픔이 차란차란 밀려온다.

 

각종 스포츠 활동이 시작되는 따뜻한 봄날 때문인지, 아니면 스포츠를 연구하는 학자로서의 본능적 사명감인지, 본인은 매년 4월이면 어김없이 우리 아이들을 생각하고, 또한 우리 아이들이 환호하고 좋아했을 스포츠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 아이들에겐 스포츠 활동은 어떤 의미였을까? 따사로운 봄날의 공놀이는, 마음껏 소리 지를 수 있는 시끌벅적한 경기장에서의 프로스포츠 관람은 우리 아이들에겐 어떤 추억이었을까? 그리고 아이들을 떠나보낸 유가족분들에겐 스포츠가 어떤 위로 기제였을까? 아니 스포츠가 과연 조금의 위로라도 되어 드렸을지, 자꾸만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철저한 정치적 목적에 의해 태동한 프로스포츠이기에, 사실 그 출신 성분은 좀 민망하고 부끄럽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정권연장을 위해 스포츠를 ‘악용’하려고 했던 군사정권의 만행과는 별개로, 사실 우리 사회는 스포츠를 통해 많은 위로와 격려를 받아왔다. 때로는 땀과 눈물로, 때로는 승리의 감동으로, 때로는 유쾌한 기억으로 스포츠는 이미 우리의 희로애락을 나누는 독특한 문화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무슨 연유에서인지, 우리나라는 참으로 가슴 시린 참사를 너무도 자주 겪고 있다. 1990년 세모 유람선사고,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사고, 2009년 용산 화재사고, 2010년 천안함 침몰사고, 2017년 제천 화재사고 등,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아픈 일들이 우리에게 너무도 자주, 그리고 계속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그때마다 스포츠는 우리의 위로가 되어온 것이 아닌지 조심히 생각해본다.

시간이 갈수록 스포츠에 직접 참여하는 참여 스포츠 인구는 크게 늘고 있으며, 프로스포츠의 관중 수 역시 각종 참사 이후에 매번 큰 폭으로 증가하여 왔다. 또한, 세월호와 같은 국가적 참사는 아니지만, 지속적인 경제 침체나 경제성장률 하락 속에서도 스포츠의 직간접 소비는 지속적으로 늘어왔다. 즉, 우리 사회가 아프고 힘들 때마다, 우리에게 위로를 넌지시 건네줬던 매개체. 바로 그것이 스포츠가 아니었을까?

물론 사회적 사건⦁사고와 스포츠의 소비 확대를 단순 연관 짓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너무도 많은 외생변수가 존재하고 있으며, 스포츠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들의 너무도 다른 개인화된 동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포츠가 이미 우리의 문화가 된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스포츠의 문화화는 사회 현상학적의 관점에서 ‘우리 삶의 일부화’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문화가 된다는 것은 함께 울고 함께 웃는, 함께 향유할 수 있는 보편 타당성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스포츠의 사회문화적 메커니즘이 강조될수록, 스포츠의 필연적이고 본연적인 정체성은 ‘위로’와 ‘기쁨’을 모두 포함한 ‘함께’로 수렴되어야 한다. 따라서 스포츠를 우리에게 제공하는 선수들의 활동은 승리의 무한 추구가 아닌, 우리 모두가 ‘함께’ 즐기고 공감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어야 한다.

최근 프로스포츠에서는 오심에 대한 판정시비가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프로야구에서 특정 선수가 보여준 행동은 이해하기 힘들 정도였다. 심판의 판정이 부정확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 정도는 요즘 팬들 정도면 누구나 알 수 있다. 따라서 해당 선수가 처한 상황에 대해 같이 안타까워하고 때로는 같이 분노하며 심판에게 무언의 압력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앞서도 언급했듯이 스포츠는 이미 우리 모두 ‘함께’ 즐기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당 선수가 이후 보여준 행위는 적어도 필자의 눈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실망스러웠다. 스포츠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배제되었고, 스포츠에서만 볼 수 있는 상호 존중의 고귀한 과정 역시 생략되었다. 그저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은 채, 어떻게 하면 그대로 심판에게 돌려줄 것인지만 고민하는 것만 같았다. 물론 본인은 실수라고 강변해도 말이다.

그 선수의 올해 연봉은 6억이며, 프로야구에서 최고 연봉을 받는 이대호 선수의 연봉은 무려 25억이다. 우리 사회의 압도적 다수인 우리, 그리고 여러 아픔과 참사에도 묵묵히 자기 자리와 우리 사회를 지키고 계신 분들에게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금액이다. 본인은 본 지면을 통해 높은 연봉에 대한 불만이나, 연봉 값을 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선수의 그와 같은 억대 연봉은 결국 시장에서 생성된 가치이며, 시장의 구성 요소에 대한 규명은 결국 다시 ‘우리’로 회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스포츠의 인기가 커지면 커질수록, 스포츠의 지향점은 다시 ‘우리’가 되어야 한다.

심판 판정에 대한 선수의 보복은 우리가 보기에 납득이 가능했는가? 그 선수의 행동은 우리 사회의 위로 기제로서 묵묵히 자기 역할을 해왔던 스포츠의 정수에 부합되는가? 가슴 아픈 참사와 이런저런 속상한 일들로 마음이 무너진 사람들이 기대어 쉴만한 언덕이었을까?

우리 사회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포츠에서 우리 사회의 새로운 희망과 미래를 보길 소망한다. 선수가 보여주는 스포츠의 최선을 통해, 사회가 보듬어지고 위로받는 광경을 목도하길 희망한다. 그것이야말로, 세월호 참사 4주년을 맞는 우리들이, 그리고 스포츠인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작지만 가장 가치 있는 활동이 아닐까?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스포츠레저학부. 박성희 교수(sportmkt@hufs.ac.kr)

(본 글은 2015년 1월 13일 이투데이에 게재한 필자의 칼럼을 일부 참고하고 재인용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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