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밍아웃’

여기서 다룰 내용이다. 마니아를 뜻하는 일본말 ‘오타쿠’를 우리식으로 표현한 ‘오덕후’와 자신의 정체성을 외부에 공개하는 ‘커밍아웃’이 합쳐져 탄생한 신조어. 자신이 특정 분야, 사람의 팬임을 공개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덕밍아웃의 덕은 유동적으로 적절한 말로 바꿔서 사용할 수 있어 자신의 다양한 본진…아니 취향을 밝히는 데 확대되어 사용하고 있다.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에서 손예진은 ‘축밍아웃’을 한다. ‘바르샤는 바르셀로나의 고결한 정신이에요~’ 하며 바르셀로나 레플리카를 입고 던지는 눈웃음에 축구 팬이라면 어디 저런 축구 좋아하는 여자 없나 하고 한 번쯤 생각해봤을 것이다.

하지만 ‘덕밍아웃’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여성 ‘축덕’들이 자신의 팬심을 공개했을 때는, 뭔가 우호적이지 않은 반응도 분명히 있다. 축구팬 여성들이 자신의 팬심을 예기치 못하고 들통나버렸을 때 남성들이 보이는 대표적인 반응들을 가상의 여성 축구팬의 사례를 통해 모아봤다.

축덕 꿀렁(2X, 여)씨는 어제 보다 잠든 경기의 하이라이트를 보고 있다. 잠 들어 놓친 득점 장면들을 집중해서 보고 있는데 뒤에서 어떤 남자가 꿀렁씨에게 말을 걸어온다.

“야 너 축구 좋아했어?”

1. “오프사이드는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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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질문. ‘축밍아웃’한 여성들에게 반갑기까지 한 질문이다. 볼 줄 아는데 계속 물어본다. 답답이들 퇴치용으로 오프사이드의 간략한 사전적 정의 암기는 필수. 자매품으로 “룰은 아냐”도 있다.

일부 여성들은 ‘모른 척’ 할 때도 있다. 대꾸하기 귀찮기 때문. 하지만, 상대 남성이 쓸데없이 친절할 경우 오프사이드에 대한 온갖 이야기를 들으며 축구를 봐야 한다는 단점이 존재한다.

2. “그 팀 왜 좋아하냐?”

만수르 짤을 한 번도 보지 않은 자만 만수르를 욕하라 ⓒ 인터넷 커뮤니티
만수르 짤을 한 번도 보지 않은 자만 만수르를 욕하라 ⓒ 인터넷 커뮤니티

본의 아니게 ‘축밍아웃’을 해버린 꿀렁 씨. 그녀에게 남자는 계속해서 말을 걸어온다.

남 : 너 어느 팀 좋아해?

꿀렁 : 어? 난 맨시티 좋아해 헤헤

남 : 맨시티? 맨시티를 뭐하러 좋아해? 구단에 돈이 많아서?

꿀렁 : …

‘축덕’이었다는 걸 알아 차렸다면 서로의 지지팀을 파악하는 행위는 소개팅에서 서로의 기본 정보를 묻는 것과 같다. 하지만, 여성들의 ‘축밍아웃’에는 왜 항상 남자들의 속칭 ‘꼰대질’이 함께하는 것일까? 꿀렁 씨의 사례에서도 구단에 돈이 많다고 쓸데없이 ‘디스’ 당한 만수르는 도대체 무슨 죄일까…

3. “너 이 선수 알아?”

남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쿨하게 말해주자 "등짝, 등짝을 보자" ⓒBen Sutherland
남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쿨하게 말해주자. “등짝, 등짝을 보자” ⓒBen Sutherland

 

축구에 환장한 남성들에게 여성이 ‘축덕’이라는 것을 인정 받기 위해서는 참 피곤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가만히 있다가 난데없이 사진 들이밀면서 “너 얘 알아?”라고 물어보면 할 말이 없어진다. 마치 남성들에게 색조 화장품 발라 주면서 “이게 코랄 핑크야 오렌지 핑크야?”라고 물어보는 것과 비슷하다.

남자들은 명심하자. ‘축덕’ 여성들은 축구 게임 ‘피X 온라인’이 아니다. 선수 이름 검색하면 키, 몸무게, 능력치가 줄줄 나오는 존재가 아니다.

4. “너, 얼빠지?”

현빈도 안정환 옆에서 오징어가 되는데 얼빠가 없는 게 더 이상한 것 아닌가?
현빈도 안정환 옆에서 오징어가 되는데 얼빠가 없는 게 더 이상한 것 아닌가?

 

“너 오프사이드 알아?”에 대적할 만한 질문이다.

선수들을 보면서 ‘멋있다’고 수십 번 속으로 떠올린 ‘축덕’ 여성들은 ‘내가 얼빠인가?’ 혼란이 올 수도 있다. 하지만, 축구를 잘하면 멋있어 보이는 것 아닌가? 그리고 얼빠도 팬이다. 그녀들의 취향일 뿐이다.

그리고, 남자들도 축구 선수 얼빠 많다.

‘축밍아웃’한 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남성들의 RESPECT

축구 좋아하는 여자를 보면 무조건 그런다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좋아하게 됐냐”, “언제부터 좋아했냐” 같은 꽤 준수한 질문들과 “나도 그 팀 팬인데” 같은 우호적인 반응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간히 “여자 맞냐?” 혹은 “남자들이랑 친해지려고 축구 잘 아는 ‘척’하냐” 같은 ‘축잘알’ 속 뒤집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 경우도 있다.

정말 말처럼 축구 잘 안다고 남자가 꼬셔질까? “생길 사람들은 생기고 안생길 사람들은 안생긴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마음 속에 되새기고 가자.

축구 좋아하는 여자도 남자만큼 열정적으로 좋아하고, 경기 보면서 마시는 맥주의 맛을 안다. 모두 다 누군가의, 어떤 팀의 순수한 광적 팬일 뿐이다. 의심하지 말고 떠보지도 말고 서로 존중해야 넓은 축구장에서 제 짝을 찾기도 하고 좋은 스포츠 문화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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