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요한 크루이프가 향년 68세(한국나이 70세)에 타계했다고 그의 공식 홈페이지가 알렸다.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이자 감독이었던 그에게는 늘 무수히 많은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게으른 천재, 토탈사커의 아이콘, 플라잉 더치맨, 혁명가 등 크루이프는 모든 축구선수들이 원하는 수식어를 독차지 해왔다. 크루이프는 선수로써, 또 감독으로써 그는 축구를 가장 완벽하게 이해한 개인이었고 그러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축구라는 종목 자체를 바꾼 위대한 혁명가였다.
그의 업적을 단순히 선수경력만을 놓고 보더라도 충분히 ‘역대급’ 선수였다. 크루이프는는 네덜란드의 아약스에서 데뷔했는데, 당대의 네덜란드의 입지는 오늘날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당시 네덜란드는 축구계에서 변방의 자리를 면치 못했고, 아약스 역시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했다. 그러나 아약스의 전설적인 감독인 리누스 미헬스와 천재 크루이프의 등장은 아약스와 네덜란드를 유럽의 중심부로 이끌었다.
전임 감독이던 잭 레이놀드가 닦아놓은 필드 위 선수들의 전원 공격-전원 수비라는 혁신적인 전술, 즉 토털 풋볼을 아약스에 적용한 미헬스 감독은 그의 전술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행할 수 있는 필드 플레이어가 필요했고, 그게 바로 크루이프였다. 당시 국내에서 보여주던 강력함에 비해 해외에서는 인상깊은 활약을 보이지 못하던 아약스는 크루이프를 필두로 순식간에 세계 클럽의 정상자리에 올랐다. 단순히 세계 정상의 자리를 차지하는 수준을 넘어 다른 클럽들에 비해 몇 차원은 높은 수준을 보이며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초반을 그들의 시대로 만들었으며 이 시기 아약스는 3년 연속 유럽 정상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경기장 안에서 완벽한 선수였지만 경기장 밖에서는 늘 누군가와 대립각을 세우는 괴짜였다. 더불어 경기 중간중간 담배를 필 정도로 애연가였으며 훈련을 지독히 싫어할 정도로 게으른 선수였다. 결국 팀 내부에서 크루이프의 불량한 모습에 대한 성토가 터져나오기 시작했고 결국 당시 최고 이적료(2M 파운드)를 기록하며 스페인의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했는데 당시 바르셀로나 역시 13년간 우승을 못하는 등 팀 내,외부적으로 우환이 많았고 그런 부분을 타파하기 위한 수단이 크루이프의 영입이었다(당시 너무 비싼 이적료로 인해 스페인 당국이 이적을 막으려 하자 크루이프를 농기계로 표기해 등록한 일화는 유명하다).
크루이프는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첫 경기부터 2골을 기록하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던 그는 이후 엘 클라시코에서 프랑코가 보는 앞에서 바르셀로나의 5-0 대승을 이끌며 카탈루냐의 영웅이 됐다.
국가대표 선수 시절에 아쉽게도 월드컵을 들진 못했지만 이전에 축구 변방이던 오렌지 군단을 이끌고 월드컵 결승전에 오르는 등 국가대표팀에서도 무결점에 가까운 선수였다. 당시 국가대표팀에서의 그의 역할을 굳이 현대축구에 비유하자면 FC바르셀로나에서 이니에스타와 메시의 역할을 동시에 하는 정도였다고 하니 그의 존재감은 대단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가 정작 축구 역사상 최고의 인물 중 한명으로 꼽히는 이유는 은퇴 이후 감독으로써 이룬 성취 역시 만만치 않다. 그는 현역 은퇴 이후 아약스의 감독직을 맡았는데 3년간 리그컵 2회 우승에 그치는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는데, 당시 가장 대표적인 크루이프의 대항마가 바로 2002년 한국 국가대표 감독을 역임했던 페예노르트의 거스 히딩크감독이었다.
그의 감독적 역량이 만개한 곳은 FC 바르셀로나였다. 아약스에서의 짧은 감독생활을 하며 한계를 느낀 그는 바르셀로나의 감독을 역임한 후 훗날 전설의 드림팀이라 불리는 재능들을 한 팀에 불러모았다. 고이고체아, 바케로, 베히리스타인, 미카엘 라우드럽, 로날드 쾨만, 펩 과르디올라, 스토이치코프, 호마리우, 게오르그 하지 등 그가 생각하던 토털 풋볼을 실현시킬 수 있는 선수들을 캄프 누에 집결시켰다. 그리고 91년부터 3년간 무려 11개의 트로피를 수집하는 괴력을 보였다.
당시 선수단에는 유독 재능에 비해 노력을 열심히 하지 않는 ‘게으른 천재’류의 선수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호마리우의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호마리우는 현역시절 크루이프와 유사한 점이 무척 많았는데, 훈련을 등한시 하고 노는 것을 좋아했으며 파티광이었다. 그런 호마리우가 시즌 중 크루이프에게 휴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당연히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지만 크루이프는 한 가지 역으로 제안을 했는데, 다음 경기에서 헤트트릭을 한다면 바로 휴가를 가도 좋다고 했다. 호마리우는 바로 수긍을 했고 놀랍게도 경기에서 헤트트릭을 기록했다. 상대팀은 무려 레알 마드리드, 즉 ‘엘 클라시코’였다.
시간이 흐르며 영원할 것만 같았던 드림팀 역시 끝을 보였고 그는 97년 바르셀로나를 떠나며 감독자리를 완전히 은퇴했다. 비록 현역 은퇴를 했으나 그는 자주 조국 네덜란드와 아약스, 바르셀로나에 대해 때로는 칭찬을 때로는 ‘디스’를 해왔다. 크루이프는 축구라는 스포츠에서 토털 풋볼이 가장 완벽한 전술이라고 생각했기에 네덜란드나 바르셀로나가 토털풋볼에서 엇나가는 모습을 보이면 즉각 ‘비난’에 가까운 비판을 했다. 가령 2010년 월드컵 결승전을 앞둔 네덜란드 팀에게 ‘이것은 진짜 네덜란드의 축구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축구는 결승전 상대인 스페인이 더 잘한다’라고 하며 국가대표팀 전체의 분위기를 죽이는 등 그의 비판 수위는 상상 이상이었다.
그런 비판을 하는 이유는 역시 그가 이상주의자이며 그런 이상을 그가 선수나 감독으로 뛸 당시에 실현해 냈기에 당당하게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당당함은 그의 팬들과 안티 양 쪽 모두를 만들어 냈으나 결국 축구팬들이 오늘날 보고 즐기는 현대축구의 전형이 그의 발 끝과 손 끝에서 탄생했다는 것을 부정하는 팬은 아무도 없다.
불과 몇 달전 그는 폐암과 관련해 언론에 “전반전은 2-0으로 이겼다”며 병마와 싸워 이기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세상과 이별하며 후반전에 역전을 허용하고 말았다. 전 세계에서 그의 죽음에 애도를 보내고 있다. 요한 크루이프, R.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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