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대만을 떠올릴 때 무슨 생각을 할까?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본 사람이라면 예류와 단수이의 아름다운 풍경을 떠올릴 것이고,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은 중국과의 수교와 함께 일어난 대만과의 외교 단절을 기억할 것이다. 또한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에 등장했던 대만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에게는 관광지로 가장 친숙한 대만이기에 스포츠를 떠올리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가끔 올림픽에서 자국 국기를 게양하지 못하고 올림픽위원회의 깃발을 걸 때나 대만의 스포츠를 생각할 뿐이다. 당연한 반응이다. 우리에게 대만 스포츠는 미국 메이저리그에 나오는 대만 선수를 제외하고는 많은 정보가 없다.

하지만, 대만의 스포츠는 우리가 알아야 할 또 다른 영역이다. 아시아의 경제 강국인 만큼 스포츠에 대한 관심도 대단한 곳이 바로 대만이다. 항상 WBC에서 한국과 대만이 맞붙으면 경쟁 의식을 느끼며 ‘한국 타도’를 외치는 대만인이 많은 것처럼.

SIRI는 이번 기사를 통해 대만 스포츠를 소개하려고 한다. 대만 스포츠의 역사와 주요한 사건들을 정리하고, 대만의 스포츠를 통해 한국 스포츠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려고 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몰랐던 대만 스포츠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대만 스포츠의 태동, 일제강점기

본격적으로 대만에 스포츠가 시작된 것은 일제 강점기부터다. 일본이 대만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서양의 문물을 대만에 함께 들여왔고, 이 중에서는 스포츠 역시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일본에서 가장 뜨거운 스포츠는 야구였다. 대만도 야구를 중심으로 스포츠가 보급됐고, 일본의 지원 아래 대만의 스포츠는 발달했다.

당시 대만 축구에 대한 주요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보편적인 생활 체육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행정 조직은 한참 뒤에나 이루어졌다. 주로 중국인들을 중심으로 축구가 행해졌고, 일본인들은 야구에 더욱 열광했던 것이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1924년 대만축구협회(이후 중화민국축구협회)가 창설됐지만 눈에 띄는 활동을 보기 어렵다. 하지만 대만의 야구는 일제강점기 때 최초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대만의 야구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시작됐다. 1910년대까지 야구는 그저 ‘침략자의 스포츠’일 뿐이었다. 현재 대만에서의 야구 인기를 생각한다면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의 식민 정책 변화와 함께 대만의 스포츠도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대만 야구의 인기 비결은 우리나라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조선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은 식민지에 대한 정책을 대대적으로 수정했다. 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강압적인 통치 대신  ‘동화(同化)주의’ 정책을 대만에서 채택했다. 게다가 1922년부터는 대만인이 일본인과 동등한 고등 교육을 받게 해줬고, 1924년에는 체육을 장려하기 위해 모든 학교가 1년에 한 번씩 운동회를 치르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대만의 모든 학교에는 야구가 보급됐고, 점차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특히, 대만 남부의 야구 열기는 다른 곳에 비해 뜨거웠다. 이것은 일제의 인식에서 기인했다. 남부 지역에 주로 거주하는 원주민들을 ‘미개인’이라 여겼고, 이들의 폭력성을 줄이기 위해 야구 보급을 더욱 권장했다.

kano-baseball-team-of-taiwan<일본 식민지 시절의 대만 아마추어 야구팀 ‘KANO’의 감동 실화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당시 대만에서 가장 강한 야구 팀은 원주민으로 구성된 ‘능가오(能高)’였다. 1920년대 초반 가오샤 지역에서 탄생한 이 팀은 일본 총독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당시 교육 참여가 어려웠던 원주민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화리엔((花蓮) 농업학교에 입학 자격을 얻기도 했다. 이 팀은 이후 일본으로 떠나 일본 학교들과 3승 1무 4패라는 성적을 기록하기도 했다. 일본 야구계에서 대만 팀의 등장은 일종의 충격이었다. 혜성같이 등장한 선수들의 등장에 많은 학교들이 관심을 표했고, 능가오 선수 중 4명이 중학 야구 명문 헤이안(平安) 야구부로 스카우트 되기도 했다.

1930년대에는 지아이 농림학교(嘉義農林學校, 일본명 가기 노린 가코)가 일본 야구계를 뒤흔들었다. 1927년부터 대만 대표의 고시엔(甲子園) 전국 고교야구대회 출전이 허용되면서 대만 역시 꾸준히 대표팀을 일본으로 파견했다. 그 결과 1931년 지아이의 준우승이라는 결실을 거뒀다. 이는 대만 고시엔 참가 역사 상 최고의 성적이었다. 이 학교는 이후에도 대만의 야구 명문으로 발돋움해 훗날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한신 타이거즈에서 대활약하며 일본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우창정(吳昌正, 일본명 고 쇼세이)과 같은 일본 프로야구의 대스타도 배출했다.

일제의 패망, 처지가 뒤바뀐 야구와 축구

일본이 세계 제 2차대전에서 패배하며 대만은 독립을 맞이했다. 하지만 국내 정세는 불안했다. 중국에서 본격적으로 국민당과 공산당이 맞붙었고, 패배한 장제스와 국민당 세력이 대만으로 이주했다. 대만에서는 이들을 외성인(外省人)이라 부른다.

장제스가 대만을 장악하면서 대만의 스포츠 역시 국민당의 정책과 함께 변화했다. 국민당은 대만에서 일본의 흔적을 지워버리려고 애를 썼다. 게다가 기존부터 대만에 거주하던 원주민과 본성인들의 정체성 역시 부정했다. 지금까지 대만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정체성을 송두리째 부정한 것이다. 대신, 그들은 중국의 DNA를 대만에 이식시키려고 했다. 중국 전통주의가 대만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중국인들에게 야구라는 종목은 생소했다. 대신 그들은 축구나 농구가 더욱 익숙했다. 현재도 중국에서 축구와 농구는 전 국민이 관심 갖는 인기 종목이지만, 야구는 홀대 받고 있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해가 된다. 게다가 야구는 일본 제국주의가 대만에 이식한 스포츠라는 인식이 강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위안샨(圓山) 경기장이다. 1923년 설립되어 대만 야구의 성지로 불리는 이 야구장은 1951년부터 더 이상 야구를 할 수 없게 됐다. 미 군사지원고문단(MAAG)이 이곳을 본부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군사 시설이 된 위안샨 경기장은 더 이상 야구장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었다. 이후 이곳은 1989년 중샨(中山) 축구장으로 변경됐다.

반면, 이 시기 대만 축구는 르네상스를 맞이했다. 장제스가 중국인들이 가장 즐기는 축구를 대만에 보급했고, 대만의 축구 경쟁력 역시 눈에 띄게 상승했다. 1950년부터 70년까지 대만 축구는 아시아의 강호로 손꼽혔다.

비록 월드컵과 같은 세계 무대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지만, 대만은 각종 대륙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1954, 1958년 아시안게임 2연패는 대만 축구 역사상 ‘유이’한 대륙대회 우승컵이다. 게다가 1960년 AFC 아시안컵에서는 3위, 1968년에는 4강에 진출하며 A대표팀 역시 아시아에서 충분히 경쟁력 있음을 입증했다. 특히, 1968년 아시안컵 8강전에서 한국을 꺾은 것은 이 대회 대만 축구의 하이라이트였다.

당시에는 아시아 선수가 해외에 진출해서 뛴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희귀한 일이었기 때문에 유럽 무대에서 활약한 대만 선수는 없다. 하지만 대만 축구는 아시아에서 명함을 내밀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만일 그 당시에도 세계 축구 시장이 개방적이었다면 일부 대만 선수는 해외에 진출했을 수도 있다. 국민당 정부는 축구를 통해 본성인과 내성인, 그리고 원주민을 하나로 묶으려고 노력했고, 어느 정도 결실을 맺게 됐다.

대만의 외교와 함께 위기 맞은 스포츠

대만의 주요 스포츠는 자국의 외교력과 함께 위기를 맞게 된다. 바로 대만의 국제 고립. 일본의 패망 이후 국공 내전을 거쳐서 국민당 세력이 대만으로 흘러 들어와 중화민국을 세웠다. 이 중화민국은 항상 공산당 세력이 만든 중국 본토의 중화인민공화국과 대립할 수 밖에 없었다.

건국 초기에는 중화민국이 국제 사회에서 많은 인정을 받았다. 자유 민주주의 진영이 국제 사회의 주를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대만은 자유 민주주의를 공산당 세력으로 지킬 아시아 대표 국가 중 하나였다. 따라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등 주요 회의에 대만은 중화인민공화국 대신 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제 사회가 급변하면서 대만의 상황도 변했다. 미국의 핑퐁 외교 등을 통해 중화인민공화국이 국제 사회에서의 영향력을 급속도로 넓힌 것. 주도권을 잡은 중국은 ‘단 하나의 중국’ 정책을 통해 직, 간접적으로 대만과의 수교를 중단하도록 타국에 압력을 넣었고, 결과적으로 대만은 외교적으로 고립되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우리나라도 중국과 수교하면서 대만과 일방적으로 단교를 선언해 양국 관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이는 곧 대만의 축구와 야구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축구는 이를 기점으로 쇠락한 반면, 야구는 이를 기점으로 부흥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까지 아시아 최강 중 하나로 꼽혔던 축구는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했다. UN에서 설 자리를 잃어가자, AFC에서도 대만의 입지는 점차 줄어들었다. 중국의 방해도 있었고, 대만과 외교적 교류를 하지 않으려는 다른 국가들의 무관심도 있었다. 결국 대만은 1974년 AFC를 탈퇴하게 된다.

그들이 AFC 대신 가입한 곳은 OFC, 오세아니아 축구연맹이었다. 이것이 축구의 결정적인 패착이었다. OFC는 지금도 FIFA 소속 대륙 연맹 중 가장 축구 실력이 떨어지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비슷한 수준, 또는 더 강한 상대와 교류하지 못한 대만의 축구는 점점 퇴보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국민적인 관심도 줄어들었다. 대만의 경기는 주로 뉴질랜드, 타히티, 솔로몬 제도와 같이 지리적, 문화적으로 접점이 많지 않은 나라들이었다. 이름 한 번 들어보지 못한 나라와 경기를 하니 국민들은 점차 대만 축구에 대한 관심이 시들어갔다.

반면, 야구는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그 중심에는 리틀 야구가 있었다. 비록 성인 스포츠는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국제 대회에 제대로 출전할 수 없었지만, 유소년 스포츠는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국제 대회 출전이 가능했다. 그리고 대만 야구는 이 틈새 시장을 완벽하게 공략했다.

시작은 아주 사소했다. 대만 동부 타이동 현에 위치한 홍계(紅葉) 초등학교가 시발점이었다. 홍계 초등학교가 위치한 지역은 그 당시 대만의 빈민층을 구성하던 원주민들이었다. 즉, 홍계 초등학교는 대만 원주민의 자식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이들이 구성한 야구 팀은 1966년 대만 유소년 야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그저 유소년 야구 팀이 작은 기적을 만든 것으로 보이겠지만, 이후 전개는 유소년 야구 팀 그 이상의 것으로 흘러갔다. 이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대만 연합 팀은 1968년 일본 간사이 지방 대표팀을 5-1로 제압했다. 일본을 잡았다는 사실에 이들은 전국민적 스타로 떠올랐다. 국민당 정권이 이 경기를 이례적으로 생중계한 것도 한 몫 했다. 그리고 이들은 리틀 야구로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꿈을 꾸고, 실현시켰다. 1969년부터 1981년까지 세계 리틀 야구 선수권대회 중 무려 10차례의 우승을 대만이 가져간 것이다. 세계 야구계에서는 이 때부터 ‘아마 야구는 쿠바, 리틀 야구는 대만’이라는 평가를 내리기 시작했다.

chinese_taipei_national_baseball_team_on_march_8_2013<2013년 대만 야구 대표팀>

대만의 축구와 야구는 대만의 외교적 고립을 기점으로 서로 다른 길을 걷는다. 대만 축구는 성인 축구에 집중한 나머지, 우회 전략을 택했다. 그 결과는 실패였다. 축구 수준을 끌어 올리지 못하고, 오히려 경쟁력이 약화된 것. 대만축구협회는 1989년 부랴부랴 AFC로 복귀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대만 축구는 지금까지 아시아 무대에서도 약체로 손꼽힌다.

반면에, 대만 야구는 틈새 시장을 공략하는 쪽을 택했다. 세계 무대에서 고립됐으니 이를 뚫고 나갈 방법을 고민했고, 결국 ‘리틀 야구’라는 틈새 시장을 선택했다. 성인 야구의 경쟁력은 약화되더라도, 꾸준하게 유망주들을 육성하겠다는 것. 결과적으로 대만 야구의 전략은 성공했고, 이후 왕치엔밍, 리전창, 왕웨이청, 천웨인, 린즈셩 등 메이저리그에서도 통할 만한 선수들을 키워냈다.

‘승부조작’으로 발목 잡힌 야구, 다시 살 길 찾는 축구

리틀 야구의 부흥은 곧 대만 야구의 부흥으로 이어졌다. 그 정점은 프로 리그가 출범할 때였다. 1989년 10월 대만프로야구리그(CPBL)가 창설되어 대만 야구 선수들이 안정적으로 운동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졌고, 1997년에는 CPBL에 대항하기 위해 대만 메이저리그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전성기가 계속해서 이어질 듯 했던 대만 야구지만, 현재 이들은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전 국민적 관심은 여전하지만, 대만 야구의 미숙한 행정이 발목을 잡았다. 바로 승부조작 사건이다.

최초의 승부조작 사건은 1995년 ‘블랙 타이거스’ 사건이었다. CPBL은 1990년 첫 시즌 당시 네 팀으로 구성됐다. 실업 팀을 모태로 하는 다른 세 팀과는 달리 싼상 타이거스는 다양한 출신 선수들로 구성된 연합군 성격의 팀이었고 그 때문에 구단 내에 파벌이 존재했다. 이들 중엔 이른바 ‘흑도(폭력조직)’와 친분이 있는 선수가 있었다. 유혹과 담합이 쉽게 먹혀 들기 쉬운 구조였다. 파벌 중 일부는 승부조작을 시도했고, 중립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대립했다.

당시 CPBL은 큰 실책을 저질렀다. 프로야구 인기가 하늘을 찌를 때였다. 흥행에 미칠 영향을 우려한 연맹과 구단은 은폐와 축소에 급급했다. 14명이 연루됐지만 영구제명 같은 중징계는 없었다. 다들 자진은퇴 형식으로 팀을 떠났다. 외국인 선수와 감독은 조용히 계약을 해지했다. 당시 싼상 구단 후원회 비서장인 린치중은 “이 사건을 공개적으로 키우지 말고, 팬들도 거론하지 말자”는 성명을 냈다.

은폐의 결과는 이듬해인 1996년 6월 ‘블랙 이글스’ 사건으로 발전했다. 흑도는 선수 등 프로야구 관계자들을 위협하거나 향응을 제공하는 수법으로 포섭했다. 그리고 승부조작을 지시한 뒤 불법 도박에서 베팅을 해 큰 수익을 얻었다. 대만 검찰은 전해 터진 ‘블랙 타이거스’ 사건 종결 뒤에도 계속 추적을 했다. 다른 줄기를 파헤치다 보니 수십 명의 전·현직 선수가 걸려 들었다.

39명의 전·현직 선수와 조직원이 검거됐고, 23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명이 연루된 스바오 이글스는 팀 해체를 결정했다. 팬들도 등을 돌렸다. 이해 CPBL 총관중은 136만 명. 이듬해엔 55.1%가 줄어든 68만 명이었다. 관중 감소는 계속돼 2000년 총 관중 수는 30만 명 수준이었다.

이 사건 이후 대만프로야구에는 한동안 승부조작 사건이 불거지지 않았다. 하지만 CPBL과 구단은 여전히 적극적인 예방 조치를 하지 못했다. 곪은 상처를 서둘러 봉합했지만, 속으론 썩어 들어갔다. 결국 2005년 ‘블랙 베어스’ 사건이 터진다. 총 22명이 체포됐고, 라뉴 베어스 소속 선수가 9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 사건은 본격적으로 ‘중개인’이 등장했다는 데서 의미가 있다. 1990년대 두 차례 사건은 폭력조직이 직접 선수와 접촉했다. 물론, 과거에도 전직 선수가 포섭에 나섰지만, 규모가 작았다. ‘블랙 베어스’ 사건에선 무려 중개인 한 명이 두 자릿수 선수를 포섭했다.

2007년 ‘블랙 웨일스’ 사건의 양상은 ‘블랙 베어스’ 사건과 비슷했다. 차이라면 지방 토착 정치인이 개입했다는 점이다. 타이난현 의회 의장을 지낸 우지엔바오가 이 사건에 연루됐다. 흑도 조직은 약 856만 위안(약 3억원)의 수익을 올렸고, 우지엔바오는 자금줄로 지목됐다. 이 사건으로 연루 선수가 많았던 중신 웨일스 구단은 해체를 발표했다.

이듬해 발발한 ‘블랙 미디어’ 사건은 승부조작의 끝이 어디까지인지를 보여줬다. 디미디어 티렉스는 2008년 청타이 코브라스를 인수해 창단한 구단이다. 하지만 첫 시즌부터 운영난에 시달렸다. 이 사건의 주모자인 린방원은 구단주에게 자금을 빌려준 뒤 구단주를 압박해 조직원을 구단에 심었다. 폭력조직이 직접 구단을 운영한 것이다. 주로 경리 부서에 조직원이 배치됐고, 구단 관리 책임자는 린방원의 동생인 린지아칭이 맡았다.

이들은 주도적으로 코칭스태프와 선수를 협박해 고의로 경기에 지게 했다. 그리고 지하도박장에서 그 경기 결과에 베팅해 거액을 벌어들였다. 조직은 시즌 중에 외부에서 코치를 영입한 뒤 그를 중개자로 삼는 수법을 썼다. 총 16명 선수가 연루됐고, 구단 관계자 8명이 체포됐다. 단장급과 사장 비서도 포함됐다. 이 해 8월 CPBL은 디미디어 구단을 제명 처분했다.

이듬해 ‘블랙 엘리펀츠’ 사건은 CPBL 승부조작의 마지막 사례다. 주모자 린방원의 지인 차이정이주도한 이 사건은 총 59명이 연루된 대만 프로야구 사상 최대 규모였다. 이 중 52명이 팀을 떠났다. 블랙 엘리펀츠 사건을 마지막으로 아직 CPBL에선 승부조작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 승부조작을 예방하고 떨어진 야구 인기를 회복하기 위해서 연맹, 정부, 선수협회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한 번 망가진 리그와 이미지를 쉽게 회복하기는 어렵다. 이제 CPBL은 고작 4개 팀으로 운영되고 있다. 야구의 부활 여부는 앞으로 대만의 프로 스포츠 성패를 가릴 중요한 이슈가 될 것으로 보인다.

대만 축구는 아직도 암흑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의견이 주를 이루지만, 변화의 가능성은 보이고 있다. 세계는 물론, 아시아에서도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대만 축구협회는 2007년 프로화의 필요성을 절감해 사전 준비의 성격으로 ‘INTERCITY FOOTBALL LEAGUE’를 창설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현재 이 리그에는 실업 4팀, 대학 3팀이 참여하고 있다. 2018년 AFC ‘KICK OFF’ 프로그램을 통해 전면적인 프로화를 실시할 예정이지만 쉽지 않다. 원인은 남자 축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떨어지는 것도 있지만, 중국 슈퍼리그의 등장 역시 대만 축구를 어렵게 하고 있다. 실력 있는 선수들이 대만 리그에서 뛰는 대신 슈퍼리그로 이적한 것이 흥행 부진의 주요한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반면에 대만의 여자축구는 아시아 내에서도 나름 경쟁력을 갖춰가고 있다. 정책 실패를 깨닫고 대만 축구협회가 전략을 전면적으로 수정했기 때문이다. 남자 축구에서 세계의 벽을 실감한 대만 축구협회는 여자 축구를 육성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꿨다. 따라서 여자 축구 리그인 ‘대만 레이디스 리그’를 창설하는 등 여자 축구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힘을 쏟았다. 그 결과 FIFA 랭킹은 38위, AFC 가맹국 중에서는 8위에 진입했다. 만족스러운 성적은 아니지만 남자 축구에 비해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위기 속 대만, 우리에게는 또 다른 기회

그렇다면, 우리는 대만의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할까? 먼저 각 협회의 행정 전략이다. 대표적인 하계 스포츠인 축구와 야구는 어느 나라에서나 어쩔 수 없이 선의의 경쟁을 할 수 밖에 없다. 대만도 그랬다. 축구가 전성기를 맞이할 때 야구는 쇠퇴했고, 야구가 국민적인 사랑을 받을 때 축구는 점차 관심에서 잊혀졌다.

중요한 것은 위기를 맞이했을 때 각 협회는 어떠한 전략을 세웠냐는 것이다. 실패한 전략도 있고, 성공한 전략도 있다. 대만 야구는 외교 고립이라는 위기를 맞이했을 때 리틀 야구로 돌파구를 마련했지만, 승부조작에 대한 CPBL의 대처는 완전히 실패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또한 대만 축구는 남자 축구의 경쟁력이 떨어지자 여자 축구라는 새로운 해법을 제시했지만 과거 OFC로 적을 옮겨 경쟁력을 약화시킨 것은 아직까지도 발목을 잡고 있다. 최근 승부조작, 심판 매수 등으로 잡음이 많은 한국 프로 스포츠도 대만의 위기 관리 능력과 실패 사례를 함께 살펴봐야 할 것이다.

tpe_w_football_team_20140830<2014년 대만 여자축구 대표팀>

이와 함께 경제적인 이유도 존재한다. 대만의 스포츠는 대만 경제에 비해 많이 뒤떨어져 있다. 현재 한국과 비슷한 수준의 경제력을 자랑하지만, 프로 스포츠는 전혀 그렇지 못한 것이 대만 스포츠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대만이라는 시장은 아직 잠재력이 드러나지 않은 블루오션의 시장이라는 판단을 할 수 있다. 현재 중국 스포츠 시장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대만이라는 곳에는 많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외교 단절 이후 대만이라는 국가 자체에 대한 관심이 많이 줄어든 것도 있지만, 스포츠 교류가 활발하지 않다 보니 대만 스포츠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잘 깨닫지 못한 것도 있다.

이 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대만 시장 진출에 있어서 최대 변수는 바로 협회의 행정력이다. 그들이 어떤 정책을 가지고 스포츠를 이끌어가는가에 따라 많은 것들이 변할 수 있다. 그들의 전략과 대만 스포츠의 특성을 알아야 좀 더 쉽게 대만 시장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야구와 축구를 중심으로 소개했지만, 다른 스포츠 역시 대만에서 성행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농구다. 남녀 세미프로리그(SBL, WSBL)가 구축되어 있는 대만 농구는 국내 리그와 귀화 선수를 통해 세계 무대 경쟁력을 높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대만 스포츠들의 공통점은 다시 한 번 성장 중이라는 것이다. 약 2,3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작은 나라지만, 경제력에 걸맞게 스포츠에 대한 관심은 많다. 문제는 대만 스포츠가 아직 국민들의 관심에 맞게 성장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국민들의 관심이 존재하기에 대만 스포츠는 발전할 여지가 많다.

위기는 곧 기회가 되는 법이다. 대만 스포츠는 위기를 기회 삼아 다시 일어나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스포츠 선진국들의 다양한 노하우와 기술이 필요할 수 밖에 없다. 여기에 우리나라가 참여한다면 대만의 스포츠 시장을 개척할 수 있는 또 다른 계기가 될 수 있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대만과 문화적, 정서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한국과 대만 관광객들이 중국, 일본만큼이나 서로의 국가를 찾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다른 스포츠 선진국에 비해 한국은 대만과의 진입 장벽이 높지 않다. 외교는 단절됐지만, 경제적, 문화적 교류는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한류를 바탕으로 스포츠 교류 역시 늘려간다면 대만 시장은 우리나라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지금까지 SIRI는 대만 스포츠를 독자들에게 소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대만 스포츠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이 많다. 단순히 한국과의 경기 때만 관심을 갖지 말고, 이제는 좀 더 진지한 자세로 대만에 대한 접근이 필요하다. 우리는 바로 옆의 큰 나라 중국에게 굉장히 신경 쓰고 있지만, 중국의 옆에는 작지만 매력적인 시장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 나라는, 계속해서 말하지만, 바로 대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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