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희 칼럼] 파란 눈의 아이스하키 국가 대표팀: 귀화선수, 국가 그리고 민족
세계랭킹 23위인 대한민국 아이스하키 대표팀. 누군가 스포츠는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했던가? 이는 도깨비 같은 활약을 펼치고 있는 대한민국 아이스하키대표팀을 두고 하는 말 같다. 대표팀의 계속되는 선전이 정말인지 너무나 놀랍다. 그동안 한 번도 이기지 못한 팀들을 연파하며 연일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팀에게 패한 팀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들만의 리그’를 펼치고 있는 나라들이 절대 아니다. 아시아의 절대 강자인 세계랭킹 16위의 카자흐스탄, 영원한 맞수 세계랭킹 21위 일본은 물론이고, 아시아권 국가에는 넘지 못할 벽으로만 느껴졌던 북유럽의 강호 세계랭킹 13위의 덴마크와 17위의 오스트리아도 우리 대표팀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대선전 끝에, 드디어 최고수준의 월드챔피언십에 출전자격을 획득하게 되었다. 2009년도 디비전2에서의 우승 후 불과 8년 만에 이뤄낸 쾌거이자, 기적이라 불릴만한 성과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기적의 시나리오를 써 내려가고 있는 아이스하키 대표팀에도 온전히 드러내고 싶지 않은 민낯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특별귀화선수들이다.
우리에겐 너무나 생소하기만 했던 아이스하키. 그리고 그 생소한 만큼 취약했던 선수층. 여기에 하루하루 다가오는 평창동계올림픽. 협회와 대한체육회 입장에서는 안방에서 망신만이라도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또한, 국제아이스하키연맹은 대표팀의 랭킹이 18위까지 올라야만 개최국 자동출전을 고려해보겠다고 으름장까지 놓은 상태였다.
따라서 단기간 내에 이를 가능케 하는 유일한 방법은 귀화선수의 활용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캐나다산 대표팀’이라는 비아냥거림도 있었다. 링크에서 플레이할 수 있는 선수가 6명인데 대표팀의 귀화선수 역시 6명이었고, 그중 5명이 캐나다 선수였기 때문이다. 국민정서상 이를 지지하지 않겠다는 반대의견도 상당했다. 협회의 고육지책은 정답이 아닌 단기적 ‘해답’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단기적 처방을 왜 사용해야만 했을까? 이를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포츠를 둘러싼 제도, 환경, 시스템 등의 문제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반성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삼수 끝에 성공한 평창올림픽이 남겨줄 실질적 유산이며, 올림픽의 핵심 가치인 ‘스포츠발전’을 견인하기 위한 방안일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방안들을 대안으로 함께 고민해보고자 한다.
첫째, 승리에 대한 정의의 재확립이 요구된다. 평창동계올림픽 선수단의 규모는 약 130여 명인데, 귀화선수는 20명에 가깝다. 이와 같은 수치가 의미하는 것은 국내에 여전히 승리지상주의가 만연해 있다는 방증이다.
승리지상주의의 근원은 군부독재 정권에서 비롯된다. 이 시기부터 엘리트체육이 본격화되었으며 프로스포츠 역시 태동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정치적인 목적으로 스포츠를 기획하고 이용했다는 비판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당시 시대상을 고려할 때 스포츠는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할 수 있는 거의 유일무이한 도구였다. 따라서 스포츠경기의 승리에 집착하는 것은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와 그 궤를 같이하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배양된 감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 재미난 모순이 존재한다. 즉, 승리지상주의 온전한 추구를 위해, 국가와 민족의 ‘외부’로부터 선수를 데려와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와 민족의 승리라는 목적의 추구를 위해, 이에 반(反)하는 귀화제도를 수단으로 사용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왜 승리하여야 하는가?”와 같은 근본적-철학적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면피를 위함인지, 색 바랜 국위선양을 위함인지, 아니면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인지 말이다. 즉, 승리에 대한 정확한 동인을 찾는 것이 대표팀의 선전에 대한 환호보다 선행되어야 함은 자명하다.
둘째, 귀화 이후를 준비해야 한다. 귀화선수제도를 사용하는 이유는 올림픽과 같은 메가 스포츠이벤트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기 위함이다. 하지만 귀화선수의 활용이 고작 2주 남짓한 올림픽 기간을 위해서라면, 이와 같은 기획성 귀화에 누가 동의할 수 있겠는가? 귀화선수제도의 용인은 귀화 이후에 대한 준비가 전제되어야 한다. 귀화제도를 통한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것이 단기간의 성과목표라면, 성과의 열매에서 어떤 씨앗을 장기적 유산으로 싹틔울지를 고민해야 한다. 문제는 귀화 자체가 아닌, 귀화 그 이후이다.
셋째, 과정의 중요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평창동계올림픽은 30년 만에 다시 찾아온 올림픽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는 우리나라의 발전성과가 돋보여야 했다면,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의 정의로운 과정이 자랑 되어야 한다. 무너진 민주주의를 회복시키는 거대한 힘의 근원이 정의로운 과정이었음이 스포츠에서도 입증되어야 한다. 따라서 평창을 통해 우리 사회가 성과 제일에서 과정 중심으로, 시상대 꼭대기 위에 오르는 결과보다 올라가는 과정 자체가 더욱 중요한 스포츠의 가치가 온전히 회복되어야 한다.
스포츠의 정수는 결과가 아닌 피와 땀과 눈물이 있는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귀화는 이를 무시하고 추진하는 정책이다. 외국인 선수를 귀화시켰음에도 성적을 못 냈다고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귀화 후 결과를 뛰어넘는 유산을 미래세대를 위한 과정으로 발전시키고 상속시키지 못한다면, 정부와 협회는 엄청난 비난에 직면할 것임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국가와 민족은 엄연히 다르다. 부득이한 이유로 특별 귀화를 통해 국가라는 옷을 입혔다면, 이제부터는 국가대표 정신을 그들에게 불어넣어야 한다. 이는 단순 단일 민족성의 함양과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국가는 국민의 집합체이고, 한 국가의 대표팀이 된다는 것은 그 구성원의 대표가 된다는 엄숙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평등한 기회, 공정한 과정, 정의로운 결과가 정수인 스포츠. 우리는 귀화선수제도로 인해 스포츠의 정수 중 많은 것들을 잃었다. 다른 종목 팀도 국가대표 아이스하키팀의 선전을 부러워하기보단 되려 지금의 스포츠답지 못한 상황을 극복할 방법을 함께 모색해보아야 한다. 귀화선수를 통해 얻은 성과가 우리나라 스포츠의 고르고 너른 발전의 토양이 되도록 하는 것이, 스포츠의 마지막 남은 정수인 ‘정의로운 결과’를 열매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명심해야한다.
※ 본 칼럼은 ‘서울스포츠’ 2017년 6월호에 기고된 글로 필자의 동의를 받아 게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