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인류가 처음 지구에 발을 들인 이래 가장 먼저 발전한 스포츠는 무엇일까? 누군가는 맹수를 피하기 위해서 달린 것에 착안하여 달리기나 마라톤을 예로 들 수 있고, 혹자는 사냥을 위해 창을 던졌던 점에서 창던지기를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 언급했던 행위의 공통점은 바로 다른 동물들의 위협을 피하고 경쟁하기 위함에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달리는 행위와 도구를 만들어 창을 던지는 그사이에는 무기가 없는 상황에서 발전한 것이 바로 복싱이다. 주먹을 무기 삼아 다른 동물들과 경쟁한 것은 자신의 신체를 보호해야 하는 인간의 본능 상 당연한 일이었다(김진표, 2004). 고대올림픽에서도 9개 종목 중 권투와 격투기, 레슬링이 여기에 포함됐을 만큼 투기 종목은 사실상 인류의 시작부터 함께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유민호, 2012).
이후 시간이 흘러 현재 복싱의 기원은 18세기 초 영국에서 시작됐다. 민중들의 유희적인 차원에서 발전한 ‘프라이즈 파이팅(Prize Fighting)’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행위는 18세기 중반 통일된 규칙으로 제도화됐다. 이때 당시 영국의 산업혁명 흐름과 맞물리며 남성 노동자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오락으로 발전했으며 그 과정에서 재미를 느낀 노동자 및 귀족과 신사들은 후원자를 자처하며 경기를 즐겼다(김정욱, 2011). 복싱이라는 상품에서 돈이 거래되며 상품성을 갖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당시에는 산업혁명으로 노동이 중시되던 사회였다. 따라서 자본계급 상 위에 있는 자들이 보기에 노동이 아닌 폭력적이고 놀이적인 관점에서 쉽게 돈을 벌 수 있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여기에 19세기에 이르러서는 경찰의 단속으로 설 자리가 없어지자 프라이즈 파이터들은 미국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미국 역시 같은 이유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데 1899년 7월 9일에 발행된 뉴욕 타임즈 기사에 따르면 “일반 노동자들이 쉽게 벌 수 없는 금전적 이득은 생산적인 근로와는 관련이 없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김진표, 2004). 그러다 세계 1차대전 이후로 반전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전쟁이라는 무력적인 충돌과 맞물리며 남성적인 호전성이 사회적으로 인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전쟁 기간 동안 복싱은 군대의 체력 단련 코스 중 하나였고 복서들이 강사로 나서기도 했다. 소위 애국주의와 맞물리며 복싱은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했고 많은 주들이 이를 합법화하기 시작했다. 그 중 세계 경제의 중심지인 뉴욕에서 1920년 복싱을 합법화시킨 것이 결정적이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복싱의 폭력성 대신 유희에 더 큰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시점에서 거대 자본이 맞물리자 복싱은 미국의 상징적인 스포츠 중 하나가 됐다. 실제 복싱이 처음 열렸던 1904년 세인트루이스 올림픽부터 2012년 런던올림픽까지 미국은 금메달 50개, 은메달 27개, 동메달 41개, 도합 118개의 압도적인 성적을 자랑한다(AIBA). 이런 아마추어 복싱의 탄탄한 기반은 프로 무대까지 이어지며 무하마드 알리, 마이크 타이슨, 플로이드 메이웨더 등 수많은 레전드를 배출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주목하는 스포츠 중 하나로 발돋움했다. 1904년부터 현재까지 IOC 하계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으며 국제아마추어복싱연맹(AIBA)에 정식 등록된 국가만 5개 대륙 204개의 국가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도 복싱과 꽤 오랫동안 동행해왔다. 문헌 기록상 선조실록을 통해 1594년 4월 24일에 덕형이라는 인물이 권투(拳鬪)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중국군이 어깨와 무릎을 쉴 사이 없이 움직이고 있다’고 언급한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물론 현재의 권투라기보다 중국 무술 우슈를 빗대어 표현한 것이 유력하지만 그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김진표, 2003).
근대적인 복싱의 형태는 일제강점기 이후 1912년 10월 7일에 박승필이 유각권투구락부라는 대회의 주최로 처음 알려졌다. 1919년 12월 24일에는 YMCA 체육관에서 최초로 심판을 동행한 가운덴 이혜택 선수와 미국인 쉬버와의 경기가 펼쳐졌다. 그리고 1928년 6월 22일 YMCA와 동아일보가 공동 주최한 제1회 전조선권투선수권대회가 최초의 공식경기로서 알려져 있다. 해방 이후인 1946년에는 국제아마추어복싱연맹에 정식 등록했으며, 1948년 런던올림픽을 통해 국제대회에 참가했다. 당시 한수안 선수는 최초로 태극기를 들고 참가한 올림픽에서 플라이급 동메달을 차지했고 이후 한국은 금메달 13개, 은메달 8개, 동메달 7개라는 성과를 거뒀다(이준길, 2013). 특히 1980년대까지 한국 복싱은 올림픽 및 프로 복싱에서도 맹위를 떨쳤다. 1984년 로스엔젤레스 올림픽에서 금ㆍ은ㆍ동을 모두 휩쓴 사례가 있었고 자국에서 열린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도 시상대는 모두 한국인의 몫이었다(대한복싱협회). 이런 활약에 국민들은 국위 선양 관점에서 열광하며 복싱이 국민 스포츠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 복싱의 인기 하락과 맞물린 선수들의 처우 문제
하지만 국민소득이 증가하고 여러 다양한 대체 스포츠가 증가하면서 긴 암흑기의 터널로 들어섰다. 사실 근대 복싱이 처음 등장했던 시기인 1912년은 일제의 통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모든 국민이 어려운 시기였다. 이때 복싱은 일제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성행하며 문화통치기 시기인 1919년부터 1937년까지, 그리고 황국신민통치기인 1938년부터 1942년까지 알려진 공식 아마추어 대회만 각각 34회와 22회 개최했다(김진표, 2003). 이는 우리 국민들의 민족정신 고취와 더불어 식민지배로부터 당당히 맞설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해줬다. 특히 전조선아마추어복싱연맹이 운영된 역사적 사실은 복싱이 민족적 힘을 보여줄 수 있는 애국적인 운동임을 드러낸다.
당시 복싱은 일본에 대항하는 투쟁 의식이 강조되던 시기였고 상대가 일본인일 경우 기필코 이겨야 한다는 정신을 여러 사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일본이 서양에 대한 적대심으로 복싱을 금지함에 따라 1942년 2월 14일 조선권투구락부를 폐지시키고, 우리 국민의 체육을 통제시키기 위한 조선체육진흥회를 발족했었다. 이는 스포츠가 민족정신을 하나로 고취시키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고 이런 관점에서 복싱은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서 대일투쟁의 산물로서 여길 수 있다(김진표, 2011).
위와 같은 사례는 1960년대 이후 ‘헝그리 정신’이라는 키워드 아래 국위 선양의 한 줄기로서 복싱은 나아갈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추가적인 시설이나 장비가 필요했던 다른 스포츠는 단시간에 인프라 구축이 어려웠다. 반면 복싱은 이미 일제강점기 때부터 성행해 협회나 조직이 체계화되어 있었고, 별다른 장비가 필요하지 않은 소위 말해 몸으로만 할 수 있는 스포츠였다. 이에 따라 전술했듯 한국 복싱은 특히 1988년 서울올림픽까지 아마추어와 프로를 넘나들며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국민 소득이 증가하고 여러 다른 대체 스포츠가 등장하며 복싱의 인기는 사그라들었다. 특히 3D 기피 현상과 이에 따른 국민 정서의 변화가 큰 원인 중 하나라는 지적이다(나영일, 1998). 3D의 3개 요소인 Difficult(어려운), Dirty(더러운), Dangerous(위험한) 중 복싱은 어렵고 위험하다는 두 개의 관점을 담고 있다. 우선 위험하다는 인식은 여러 사례를 통해 입증된 바 있다. 1982년 11월 13일 김득구 선수가 WBA 라이트급 타이틀전 도중 상대 레이 맨시니에게 펀치를 맞고 쓰러진 뒤 깨어나지 못했다. 2007년에는 최요삼 선수가 WBO 플라이급 타이틀전에서 판정승 이후 의식을 잃으며 결국 뇌사 판정을 받은 안타까운 사례도 있었다. 이외에도 복싱 관련 사고는 매해 세계 곳곳에서 들려오며 선수 생명에 관한 안전 문제는 해묵은 논쟁거리다.
또한 세계 일류급 선수가 아니면 그 임금의 격차가 워낙 큰 스포츠이다 보니 복싱을 하려고 하는 이들도 점점 없어지는 추세다. 특히 1993년에 우수 선수들에게 지급하던 장학금이나 지원금이 중단되고, 복싱을 업으로 삼으려 하는 수가 하락하자 체육관 경영도 어려워지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김진표, 2005). 국민 정서 변화도 무시할 수 없다. 기존 대한민국이 빈곤의 늪에서 세계적 경쟁력이 없었던 상황에서 복싱의 선전은 곧 대한민국의 선전과도 같은 결과였다. 하지만 국가 경쟁력이 상승하자 이제는 스포츠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의 국위 선양이 가능하다. 또한 서양의 개인주의적 가치관이 퍼지면서 국가의 성과가 내 인생과는 무관한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경우도 많아졌다. 즉 위와 같은 이유로 국민적 관심과 인기가 사그라들자 시장이 줄어들고, 시장이 줄어들었다는 것은 곧 자본주의적 국가에서는 낮은 경제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요소는 안전 문제와 결부되어 복싱 인구의 하락을 유발했다. 이렇게 되면서 가장 고통받는 이들은 복싱 관련 종사자일 것이다. 프로 복서지만 사실상 프로라는 타이틀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궁핍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가령 KBS 프로그램 무엇이든 물어보살(2021) 방송에 출연한 KBM 산하 복싱M 슈퍼웰터급 챔피언 유성민 선수의 경우 타이틀전 파이트머니가 40만원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그렇다고 복싱이 야구나 축구처럼 매일 혹은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씩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전술했던 안전 문제와 감량고로 1년에 나설 수 있는 공식 경기는 손에 꼽으며 그 외에 생활비는 아르바이트를 통해 버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이마저도 최근 코로나 때문에 관중이 없어 경기를 뛰지 못했다고 한다.
더욱 심각한 점은 국내 여러 단체들 중 KBM이 KBF와 더불어 가장 활성화된 단체라는 점이다. 이는 다른 단체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의미한다. 복싱이라는 스포츠가 상품으로서 가치가 없으니 찾는 관중들이 없고 이는 스폰서의 부재까지 초래하며 프로라는 껍데기만 쓰인 채 알맹이는 거의 비어있는 모습인 것이다. 사실 이런 현상은 앞서 언급했듯 1988년 올림픽 이후 계속해서 두드러진 문제점이었다. 이때 필요했던 것은 협회 차원에서 복싱의 부흥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행정적 발판이었지만 서로 간 자리 다툼만 치열하게 전개되며 그 피해는 고스란히 선수들이 떠안게 됐다. 특히 먹고 사는 문제와 결부되는 대전료와 같은 금전적인 문제는 프로 복싱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아래 표는 프로 복싱이 아닌 아마추어 복싱인 대한복싱협회 관련 자료지만 국고 지원을 받는 아마추어 복싱도 가장 큰 약점 중 하나로 예산 부족을 지적한다(안병오, 2016). 특히 예산 부족에 따른 영향은 조직관리 부진과 중장기 발전전략 수립 부재에도 영향을 미친다. 기본적인 재정 자립이 가능해야 그에 따른 장ㆍ단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추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대한복싱협회의 2020년도 결산보고서에 따르면 기금 수입이 14억 2,793만 9,186원에 달하는 반면에 자체 수입은 2억 9,802만 577원에 그친다. 이마저도 국고 지원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지, 스스로 커야 하는 프로 복싱의 세계는 더욱 참혹하다.
출처: SWOT분석을 통한 대한복싱협회 경영전략(안병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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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혁 기자(rlarnlgur1997@siri.or.kr)
[21.10.19, 사진=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