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라이트와 개인화의 시대, 사라지는 ‘함께 보기’의 가치에 대하여’
[SIRI=노은담 기자] 스포츠를 볼수록 마음 한켠이 허전해진다. 기술은 거의 완성형의 편의를 약속한다. 멀티앵글, 실시간 알림, 즉시 하이라이트, VAR 리플레이까지—우리는 굳이 경기장에 가지 않아도, 심지어 풀경기를 보지 않아도 ‘핵심’만 빠르게 흡수한다. 그런데 바로 그 완벽한 편의가 경험의 밀도를 깎아내린다. 예전처럼 가족이 한 화면 앞에 모여 소리 지르던 순간, 동네와 학교가 한목소리로 응원하던 공기, 느리게 쌓이던 서사의 축적은 점점 얇아진다. 편리해질수록 가벼워지는, 아이러니한 진공이 우리 곁을 파고든다.
나는 이 변화가 단지 ‘취향의 이동’이 아니라 삶의 태도 자체를 바꾸고 있다고 느낀다. 중계가 보편화되기 전, 우리는 시간을 들여 경기장을 찾았다. 결과를 모르고 떠는 불안, 현장에 스며드는 냄새와 소리, 앵글 밖에서 벌어지는 작은 사건들이 모두 감정의 지형을 만들었다. 팬이 되는 일은 그 지형을 함께 걸어가는 일에 가까웠다. 그러나 각자의 스마트 기기가 생긴 뒤로 우리는 선호하는 장면만, 필요한 정보만, 짧고 강한 순간만 골라본다. 긴 호흡의 서사는 지루한 시간으로 분류되고, 하이라이트는 시간을 절약해 준다는 이유로 ‘합리적 선택’이 되었다. 그 사이에 ‘함께 보기’는 사라졌다. 올림픽과 월드컵 같은 메가 이벤트조차 서로 다른 화면 속 각자의 시간으로 해체되었다. 같은 장면을 동시에 본다는 단순한 사실이 만들어내던 결속감. 그 미묘한 경험이 점점 삭제되고 있다.
경기장 역시 달라졌다. 야구장, 축구장을 찾는 발걸음 중에는 ‘인스타에 자랑하기 위한’ 얕은 동기가 끼어든다. 현장에서는 아무리 좋은 좌석도 모든 맥락을 설명해 주지 않고, 반면 온라인에서는 편파 없이 흐름을 요약해 주며, VAR과 하이라이트로 중요한 장면을 무한히 돌려볼 수 있다. 이 불균형은 “직관은 손해”라는 사회적 인식을 만든다. 이동과 비용, 시간의 희생 없이도 핵심을 더 빨리, 더 정확히 확인할 수 있는 곳이 내 손안에 있을 때, 우리는 굳이 현장을 선택하지 않는다. 결국 현장은 ‘분위기 체험’으로 축소되고, 현장의 서사와 공동체의 결속은 힘을 잃는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현장은 어차피 AR 그래픽과 데이터 오버레이가 없는 불편한 시청 환경일 뿐”이라고. 하지만 바로 그 불편함이야말로 현장이 제공하는 인간적인 잔향이었고, 그 잔향 덕분에 우리는 경기의 전후 사정과 감정선을 온몸으로 기억해 왔다.
알고리즘은 이 경향을 가속한다. 플랫폼은 이탈을 막기 위해 흥분의 정점만 뽑아낸다. 득점, 판정, 논란이 전면에 배치되고, 빌드업과 맥락, 택틱의 실험과 실패는 체류시간 최적화의 논리에서 불리하다. 그 결과 스포츠는 순간의 쾌감으로 분절되고, 팀과 선수, 팬이 함께 시간을 들여 관계를 맺던 장기 서사는 바닥부터 흔들린다. 더구나 인기 구간 중심의 노출은 비인기 종목과 여성·청소년 리그를 후순위로 밀어내며 생태계의 다양성과 공정성을 갉아먹는다. 상업화의 편의는 강하고, 공익적 다양성은 알고리즘의 뒤편으로 미끄러진다. 여기에서 생기는 조용한 손실은 한 세대 후에 더 크게 돌아온다. 확장성 있는 팬베이스가 사라지고, 지역·학교 단위의 응원 문화가 비어 버리면, 산업은 단기 조회수는 늘려도 장기 지지 기반을 잃는다.
여기에 AI가 얹힌다. AI는 분명 우리를 돕는다. 다만 나는 때때로 두렵다. AI가 우리에게 편리함을 계속 주는 동안, 우리는 스스로 해석하고 토론하고 기억하는 능력을 조금씩 내어주는 게 아닐까. 요약과 자동 해설이 풍경이 되면, 우리는 ‘함께 겪는 어려움’-모르는 채로 90분을 통째로 버티며, 맥락을 스스로 이어 붙이고, 타인과 감정을 맞추는 그 귀한 시간-을 점차 잃는다. 기술을 온전히 ‘받기만 하는 자’의 개인 능력은 점점 줄어들 것이고, 어느 날 문득 우리는 기술에 잠식당한 뒤임을 뒤늦게 자각할지 모른다. 더 편하고, 더 쉽고, 더 효율적인 것들을 끝없이 추구한다면, 우리는 결국 같은 모습과 같은 생각으로 수렴해, 불안도 욕망도 없이 그저 흘러가는 존재가 될 수 있다. 기술은 우리를 돕되, 우리를 대신해 감동하고 기억해 주지는 않는다.
또 하나의 문제는 ‘시간의 환상’이다. 하이라이트 소비는 시간을 절약해 준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시간을 잘게 쪼개어 흩뜨린다. 순간적인 흥분을 여러 번 나누어 주입받을 뿐, 감정의 곡선은 사라진다. 한 경기의 느린 리듬은 체력과 전략, 우연과 필연이 교차하는 드라마였는데, 하이라이트는 그 드라마의 인과를 제거한 채 결과만 보존한다. 결과를 알아버린 뒤의 재관람은 재학습이지만, 모르는 채로 함께 보는 관람은 공동의 모험이다. 편의가 늘어날수록 우리는 모험을 포기하고 정답만 복습한다. 그 선택이 반복되면, 스포츠는 시험문제의 해설처럼 변하고 만다.
추가로, 빈부격차의 문제도 외면하기 어렵다. 자본과 시간의 여유가 있는 이들은 고화질 스트리밍, 유료 분석 서비스, 프리미엄 좌석과 전용 라운지, 맞춤형 굿즈까지 경험의 격 자체를 상향시키는 옵션을 누린다. 반면 생계와 학업, 돌봄으로 시간이 부족하고 지출 여지가 적은 이들은 데이터 요금과 구독료, 이동·입장 비용 앞에서 일찍 선택을 포기한다. 같은 경기를 보더라도 누군가는 ‘전체 서사’를, 누군가는 ‘요약된 결과’만 소비한다. 경기장 안팎의 서비스가 차등화될수록 ‘함께 본다’는 사실조차 계층에 따라 다른 품질의 추억으로 분화된다. 기술은 보편적 접근을 약속하지만, 실제로는 결제 장벽과 번들 요금, 지역 인프라의 불균형을 통해 경험의 사다리를 더 가파르게 만든다. 그 결과 스포츠는 공동의 언어라기보다 지불 능력에 따라 다른 언어로 번역되는 콘텐츠가 되고, 우리는 같은 골을 봤더라도 서로 다른 세계를 기억하게 된다.
우리의 기술은 충분히 발달했다. 더 이상의 편의는 때로 과도한 욕심일 수 있다. 스포츠의 본질은 결과와 돈과 인기만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통과하는 정과 사랑, 때로는 아픔과 고통, 함께 떨고 웃는 유한한 시간의 연속성, 전부를 가질 수 없다는 결핍이 만드는 소소한 행복에 있다. 한 인간의 일생처럼, 산업에도 욕심을 절제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만족을 모르는 진보의 속도는 결국 피로와 무감각으로 되돌아온다는 걸, 우리는 이미 여러 미디어의 경고 속에서 보아 왔다.
기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다. 다만 우리가 지킬 것을 정하자고 제안한다. 함께 보기의 동시성, 느리게 쌓이는 서사, 현장에서만 가능한 불완전함의 아름다움. 이것들을 남겨두기 위해 우리는 속도를 일부러 낮추고, 불편함을 조금은 감수해야 한다. 때로는 결과를 미리 보지 않고, 알림을 끄고, 90분을 온전히 통과하는 경험이 필요하다. 그 시간의 무게는 요약 영상 열 개로도 대체되지 않는다. 스포츠가 다시 공동의 기억을 생산하는 장이 되려면, 더 보기 쉽게가 아니라 더 함께 보게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요약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본질이 더 빠르게 증발한다는 사실을, 이제는 산업과 우리 모두가 인정할 때다. 기술이 만든 편의의 총합은 결코 경험의 총량을 대체하지 못한다. 그리고 바로 그 틈, 유한한 삶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다시 스포츠를 사람의 일로 되돌릴 수 있다.
스포츠미디어 시리(Sport Industry Review&Information)
노은담 기자(ddaltwo9@naver.com)
[25.10.17 사진 = thekfa 공식 인스타, coupangplay 공식 유튜브 화면 캡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