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리쉬 프리미어리그(EPL)의 지난 시즌은 충격을 안겨주며 종료됐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변방의 팀, 레스터시티가 우승했던 것. 레스터시티에게는 팀 창단 132년 만의 첫 우승. 이러한 결과는 시즌이 종료된 뒤에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꾸준히 이슈가 된 바 있다.
사실 레스터시티는 몇 년 전 만해도 2부리그를 전전했고, 2000년 대 초반에는 3부리그로 강등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샌가 2부리그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1부리그로 올라온 후, 작년에 기사회생을 한 차례 하더니 올해 덜컥 우승을 해 버린 것. 기적과도 같은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기적같은 레스터시티의 우승은 과연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몇 가지 중요한 의미들을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이미 많이 알려진 얘기지만, ‘B급 감독과 선수들의 성공 스토리’다. 우선 이 팀의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감독은 B급이라는 평가를 받지만, 첼시, 유벤투스, 모나코 같은 굴지의 클럽에서 이미 준우승만 몇 차례 일궈낸 이력이 있다.
그는 초일류 명장급은 아닐 지라도 맡은 팀들을 대부분 좋은 팀으로 변화 시켜온 실력파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부리그 우승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무시 당해 왔는데 이번에 화려하게 반등에 성공한 것.
소위 ‘흙수저’로 불렸던 선수들도 많았다. 공격수 제이미 바디 같은 선수는 불과 몇 년전까지만 해도 공장 근로자로 일하면서 8부리그에서 뛰었다. 뿐 만 아니라 프랑스의 빈민가 출신으로 스무 살이 다 될 때까지 거리에서 축구를 배웠다는 미드필더 리야드 마레즈도, 또 왜소한 신체조건 때문에 여러팀으로부터 외면당했다는 은골로 캉테 선수도 대표적인 흙수저라 들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들이 팀의 중추역할을 감당하면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는 것. 이들은 지금 메이저 클럽팀들의 끈질긴 구애를 받았고, 일부는 실제로 이적하기도 했다. 특히 전천후 미드필더로서 놀라운 스테미너로 중원 장악력을 과시했던 캉테는 수많은 유럽 명문 구단들의 구애 끝에 결국 첼시에 입단했다.
또한 레스터시티의 기적 같은 우승을 보며 ‘질서를 파괴했다’고 보는 평가가 많다.
그 중에서도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기존의 축구판 질서를 파괴했다’고 보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 동안 전 세계 프로 스포츠계는 돈을 많이 쓴 팀 순으로 1등부터 꼴찌까지 등급을 매기던 것이 상식처럼 여겨져 왔다. 하지만, 레스터시티의 우승으로 이런 원리가 깨졌다거나 상당부분 흠집이 났다고 보는 것.
쉽게 말하자면 ‘투자를 많이 한 팀일수록 우승 가능성이 높다’는 일반적인 인식이 상처(?)를 받은 셈이다. 어떤 팀이 프로축구 리그에서 우승하려면 반드시 갖춰야 되는 것이 바로 구단의 아낌없는 투자다. 이 투자는 경기력 강화의 관점에서 대략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좋은 선수를 영입하는 것’ 그리고 ‘체계적으로 어린 선수들 육성을 잘하는 것’이다. 둘 다 강팀을 만들기 위한 필요조건이고, 당연히 큰 돈이 들어간다. 좋은 선수는 높은 몸값이 이미 책정되어 있기 때문에 영입하려면 뭉칫돈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고, 또 체계적으로 어린 선수들 육성을 하는 것도 장기적으로 비용이 발생하니까 역시 적지 않은 노력과 돈이 들어가는 일이다.
어쨌든 프로 축구계에서 강한 팀을 만들기 위해서는 재정적으로 넉넉해야 되는 것이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실제로 대다수 프로팀들이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또 그렇게 천문학적인 투자로 좋은 선수를 많이 데리고 있는 팀이 그동안 우승을 차지해 왔다.
그래서 맨유나 첼시같이 부유한 클럽들이 그동안 우승을 많이 해온 것이다. 이는 축구계 뿐 만 아니라 다른 스포츠 리그도 마찬가지다. 성적은 투자를 많이 한 순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언제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대부분 그런 흐름이었고 또 그렇게 만들어진 질서 안에서 많은 이들이 순응해 왔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레스터시티가 이것을 뒤집은 것이다.
그렇다면, 레스터시티의 무엇이 그 질서를 뒤집는데 공헌 한 것일까? 즉, 이 팀의 성공요인은 무엇일까?
우선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첼시 선수 연봉 총액의 5분의 1)으로 큰 성과를 냈다는 점에서 효율적으로 팀을 잘 경영했다고 볼 수 있겠고, 또 감독이 인자한 아버지 같은 리더십으로 선수들을 신뢰하는 가운데 소통을 잘해서 신뢰감을 형성했다는 얘기도 많이 들린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여러 경로에서 나온 분석글과 기사 등을 갈무리하는 과정에서 조금 깊이 있게 팀 운영상의 내막을 들여다 보니 좀 특이하면서도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다. 바로 ‘감독과 선수가 우승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적어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했다’는 것.
레스터시티는 우승 생각을 최대한 자제한 채 그냥 즐겁게 경기를 하는데에만 집중했다고 한다. 심지어 라니에리 감독도 우승을 목전에 두고도 ‘목표가 우승이다’는 말을 최대한 아꼈다고 한다. 또 자신들은 잃을 것도 별로 없는 처지고, 우승은 열심히 경기하면 덤으로 주어지는 것이니까 ‘매 경기마다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라는 얘기를 꾸준히, 의식적으로 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진짜 우승을 했다.
이것은 마치 수험생이 ‘교과서 위주로 공부를 열심히 즐겁게 했더니 어느 날 전국 수석이 되었다’ 류의 이야기 같아 보이기도 한다. 좀 뜬구름 잡는 뻔한 얘기 같기도 하고, 선수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한 얘기일 수도 있다. 또한 라니에리 감독의 일대기를 생각하면 우승 경험이 없었던 감독이 스스로에게 거는 일종의 자기최면 같기도 하지만 어찌됐건 효과는 분명히 있었다.
엄청난 부담감과 중압감 때문에 우승을 눈앞에 두고 실수를 되풀이하다가 만회하지 못한 채 사라져간 선수와 팀들을 우리는 무수히 많이 봐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레스터시티는 시즌 막판까지도 실수를 거의 하지 않았고, 위기 때마다 바로 극복을 했으며, 매우 안정적으로 경기를 운영했다. 감독이 원했던 ‘부담없이 즐기는 축구’가 통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레스터시티의 우승을 두고 ‘잃을 것 없는 선수들이 써 내려간 동화’라는 얘기가 나온다. 라니에리 감독은 지난 2월 초 인터뷰에서 “우리 팀이 돈이면 다 되는 세상에 희망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선물했다. 돈이 전부가 아님을 성과로 입증했고, 팀의 미생들은 비로소 완생이 됐다.
물론 다음 시즌에는 레스터시티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빅 클럽들이 일부 주전 선수들을 데려가는데 성공했고, 아직도 물 밑에서 접촉을 시도하고 있다. 레스터시티의 입장에서는 우승 당시의 전력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또한 다음 시즌부터는 ‘디펜딩 챔피언’ 레스터시티를 상대하는 모든 팀들이 치밀하게 대응전략을 마련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제는 아무도 더 이상 그들을 하수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년의 레스터시티는 올해 보다 훨씬 힘든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적어도 당분간은 ‘돈이 좀 없어도 EPL에서 우승할 수 있어’라고 주장해도 작년처럼 마냥 조롱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1년 새 확 달라진 현실이 만들어 진 것. 이것 만으로도 레스터시티의 성공은 참 대단한 것이다. 그래서 돌아오는 시즌에는 또 어떤 미생들이 등장해서 희망적인 사건을 만들어낼지 내심 기대가 된다.
글 = 한동유 (한남대학교 교수)
한남대학교 생활체육학과 교수
한국사회체육학회 총무이사
루이빌대학(University of Louisville) 스포츠 경영학 박사
한국 국가대표 축구팀 및 루이빌대학 농구팀의 열혈팬
※ 본 칼럼은 대전 KBS1 FM ‘생방송 대전입니다’에서 한동유 교수의 출연 및 대담 내용을 재구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