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스포츠산업 지식 정보의 허브, 시리가 준비한 금번 특집은 ‘한국 여자프로농구의 현황과 선수들의 은퇴 후 진로에 대한 고찰’입니다. 이를 위해 여자 프로농구선수의 레전드 중 한명이자 독보적 3점 슈터였던 김은혜 해설위원과 한국외대 박성희교수와의 대담 전체를 그대로 옮깁니다. 대담 전체 영상은 아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박성희 교수(이하 박) : 안녕하세요.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김은혜 위원(이하 김) : 제 이름은 김은혜이고요. 저는 농구선수로서 20년 정도 활동하다가 현재는 은퇴를 하고, 여자농구 해설위원을 하면서 또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박 : 어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계신가요?
김 : 기독 중학교인데요. 방과후에 하는 활동이기는 하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은사를 아이들에게 나눠주면서 농구에 대한 재미를 가르쳐주고 하는 그런 부분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박 : 시즌 기간에는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계시죠? 지난 시즌에 첫 데뷔를 하셨는데 소감이 어떠셨나요?
김 : 우선 초반에는 너무 긴장도 많이 하고 제가 농구를 20년동안 오래 했지만 그렇게 알았던 농구와 말로 설명해야하는 것들이 다르더라고요. 그래서 너무 힘들기도 하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그랬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굉장히 재미있는 부분도 있고 제가 좋아하는 농구의 바운더리안에서,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는게 굉장히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박 : 해설위원을 하면서 팬분들도 많이 생기셨죠? 선수로서 말고 해설위원으로서 팬들?
김 : 제가 한 팀에서만 오래 있었기 때문에 팀을 좋아했던 팬들이 예전엔 많았는데, 이제는 다른 팀의 다른 팬들이 많이 좋아해주시더라고요.
박 : 여자농구 해설계의 독보적인 존재가 아닌가 싶습니다. 김은혜 선수가 농구선수가 되신 계기를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김 : 우선은 신장이 굉장히 컸었어요.
박 : 아 어렸을 때부터?
김 : 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워낙 크셔가지고. 그리고 운동은 굉장히 좋아했지만 농구라는 걸 접했던 거는 예전에 제가 초등학교 때 ‘마지막 승부’라는 드라마가 있었는데요. 그 드라마를 보면서 너무 멋있는 매력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제가 학교에서 농구를 친구들과 하게되고, 부모님에게 선수를 하겠다고 했는데 저희 아빠가 축구선수 출신이시거든요. 운동을 반대하셨죠. 근데 제가 무작정 하겠다고 해서 운동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박 : 그때가 정확히 몇학년 때인가요?
김 : 제가 5학년 때쯤 했습니다.
박 : 그럼 조금 늦게 운동을 시작한 편 아니신가요?
김 : 그렇죠. 조금은 늦게 시작을 한 편이었습니다.
박 : 농구선수가 되신 다음부터는 꽃길만 걸어오셨죠(하하)?
김 : (웃음) 그렇게 볼 수도 있는데, 그래도 꾸준히 유망주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라기는 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IMF가 터지면서 선수들이 운동을 그만두고 이러면서 팀이 해체될 위기에 빠졌었거든요. 그래도 지켜준 몇 명의 친구들 덕분에 학교가 조금 유지가 되고, 저희 학교가 전통이 있는 팀이라서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지금까지 유지가 되고 있는 것 같아요.
“팀 동료들도 모르고 코칭스태프들도 모르는 상태에서 제가 이 순간, 이 자리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그 자리에서 그래도 나름대로 제가 잘해서 경기를 이기고 했던 부분들이 저한테는 제일 기억에 남았던 것 같아요.”
박 : 김은혜 선수의 경력을 보면 2007년에 아시아 여자 농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 경험도 있으시고, 그 외에도 여러 기억이 남는 경기가 있었을 텐데요. 본인에게 있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인생경기가 있으신가요?
김 : 인생경기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제가 프로팀에서 우승을 5번 했었고, 우승을 할 때마다 매번 기뻤던 순간들이 많이 있었는데요. 그런거 외에도 저는 제일 기억에 남는 부분은 제가 은퇴를 앞두고서 저 혼자만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었잖아요. 팀 동료들도 모르고 코칭스태프들도 모르는 상태에서 제가 이 순간, 이 자리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그 자리에서 그래도 나름대로 제가 잘해서 경기를 이기고 했던 부분들이 저한테는 제일 기억에 남았던 것 같아요.

박 : 주변에서 이른 은퇴에 대해서 굉장히 아쉬워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물론 부상의 여파가 있었겠지만 왜 이렇게 빨리 은퇴하시나 하는 생각들이 많이 있었거든요. 거기에 대해서 지금 밝혀주실 수 있으신가요?
김 : 사실 빠르다고 하기도 그런데, 제가 32살에 은퇴를 했는데요. 우선은 그 시즌 전에는 제가 그만둬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진 않았어요. 그런데 시즌을 준비하면서 제 몸이 예전만큼은 성장하지 못한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코칭스태프가 바뀌면서 운동량이 굉장히 많아졌었는데, 그 훈련들을 소화하는 과정에서 예를 들어 제 포지션에서 저보다 못 했던? 친구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저보다 좀 뒤쳐져 있던 친구들은 성장세가 눈에 보이는데, 저는 계속 스스로가 제자리를 걷고 있다라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런 부분들이 제가 부상을 당했던 것과 겹쳐지면서 몸이 빨리 안 올라오더라고요. 또 다시 계속 아프고 아프고 이런 것들이 반복되다 보니까 여기까지만 하라는 뜻인가보다 이런 마음이 들면서 시즌을 마쳤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 마지막 경기 또한 저 스스로만 이게 나한테는 마지막이니까 정말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박 : 그 전까지는 감독님이나 코칭스태프들은 전혀 은퇴를 하실거라는 걸 모르고 있었던 거죠?
김 : 네 (웃음)
박 : 굉장히 파격적이고 다른 분들이 놀라셨을 것 같은데, 사실 여자농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레전드 분들이 여럿 계시는데, 전주원 선수 같이 굉장히 선수생활 오래하시고, 그런 분들을 보면서 조금 더 몸을 추스리고 해보자 이런 생각도 가능했을 것 같거든요? 만약에 은퇴소식이 알려졌을 때에는 이런 얘기들이 굉장히 많았을 것 같은데, 그런 마음은 없었나요?
김 : 팀에서는 잡았죠. 왜냐하면 저희가 5, 6년 정도 꼴찌를 하고 있다가 은퇴하는 그 해에 우승을 했어요. 우승을 했을 때 저는 한 팀에서만 오래 있었기 때문에 프랜차이즈가 우승하고 바로 나간다라는 건 팀에서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근데 어떻게 보면 이게 저의 자존심이었던 것 같아요. 뭔가 좀 더 제가 팀에서의 역할이 컸거나 이랬으면 조금 더 이어갔을텐데 제가 부상으로 인해서 포지션 변경이 있었어요.

박 : 원래 스몰포워드를 하셨죠
김 : 네. 그런데 3번, 4번이 되면서 제 포지션이 아닌 다른 포지션으로 움직이면서 그 포지션은 외국인 선수의 자리이다 보니까 아무래도 외국인 선수가 안 뛰는 시간이 없잖아요. 그럼 제가 다른 선수와 자리를 바꿔야되는데 그런게 제가 어릴 때부터 항상 한 포지션만 유지하다가 바꿔야되는 거 자체가 제 스스로 좀 견딜수 없이 힘들었던 것 같아요.
“제가 고등학교 때 저희 팀이 해체될 뻔 했을 때도 마찬가지고 그때 이후로부터는 좀 출중한 선수들 한둘 외에는 선수들도 너무 선수들도 많이 없고 그러다보니까 농구의 인기가 점점 사라지고 이런 부분들이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싶은데요. ”
박 : 이제 여자농구 관련해서 질문을 드릴게요. 사실 우리나라 여자농구 대표팀이 84년 LA올림픽 때 은메달을 땄고요. 그 당시를 기억하는 분들이 아직까지 굉장히 많으세요. 그 당시의 Fighting Spirit이 굉장히 열정 넘치고 패기 넘치는 모습들이 있고. 2010년도 아시안게임 은메달을 땄고, 14년도에 인천 아시안게임도 우승했었고, 그 이후로는 여자농구의 뚜렷한 하락세가 눈에 띕니다. 그 이유는 뭐라고 판단하시나요?
김 : 우선은 2014년도에 아시안게임을 우승하긴 했지만 그게 아시아권에서 중국이나 일본이 정규 멤버가 다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저희가 우승을 하긴 했어요. 그런건 둘째치고 우선은 저변이 너무 얕다고 해야하나? 지금을 봐도 엘리트 선수들이 제가 운동할 때만 해도 팀에 선수들이 워낙 많았고, 그 안에서의 경쟁을 통해서 프로팀을 가든지 대학을 가든지 그런 부분들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부분에 있어서 좋은 선수들도 거기서 나왔고 신장이 좋은 선수들, 운동능력이 좋은 선수들이 많이 있었는데 지금은 각 팀에 엘리트 선수들을 보면 5명? 6명? 이렇게 밖에 없다보니까 거기서 선수들이 프로까지 올라와서 뭔가 이뤄내기에는 저변이 너무 얕다라는 느낌이 드는 것 같아요.
그게 제가 고등학교 때 저희 팀이 해체될 뻔 했을 때도 마찬가지고 그때 이후로부터는 좀 출중한 선수들 한둘 외에는 선수들도 너무 선수들도 많이 없고 그러다보니까 농구의 인기가 점점 사라지고 이런 부분들이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싶은데요.
박 : 여자농구만의 재미. 이걸 사실 모르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김은혜 선수는 은퇴를 하셨지만 그 재미가 딱 뭐다라고 얘기하실 수 있을까요? 남자농구와 비교했을 때 가장 큰 재미?
김 : 제가 어릴 때부터 항상 추구해왔던 농구, 그리고 제가 만났던 감독님들이 추구했던 농구가 여자농구는 항상 조직력있게 움직이는 뭔가 아기자기함이 좀 더 곁들여 있는 것이고, 그런 부분들을 강조하시는 감독님들을 저는 만났었는데, 최근 농구의 흐름을 보면 NBA도 마찬가지지만 개인기를 위주로 한 자기 스스로의 운동능력을 가지고 스킬을 보여주면서 멋있고 화려한 농구를 하는게 추세가 되다보니까 지금 여자농구선수들도 비시즌동안 그런 훈련들을 많이 하고있어요.
“제가 생각하는건 조직력을 통해서 서로 패싱게임을 하다가 시원하게 넣어주는, ‘이건 딱 들어갔다. 우리가 봐도 들어갔다.’라는 그런 득점들이 나오는게 여자농구만의 재미인데, 그런게 혼자서 하는 개인플레이와 섞여지다보니까 오히려 오픈찬스 때 못 넣는 선수들이 많아졌어요.”
그런 부분들을 경기장에서 확실하게 다 보여주지 못하거든요. 이게 아직까지 완전히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데 제가 생각하는건 조직력을 통해서 서로 패싱게임을 하다가 시원하게 넣어주는, ‘이건 딱 들어갔다. 우리가 봐도 들어갔다.’라는 그런 득점들이 나오는게 여자농구만의 재미인데, 그런게 혼자서 하는 개인플레이와 섞여지다보니까 오히려 오픈찬스 때 못 넣는 선수들이 많아졌어요.
쉬운 것들을 놓쳐버리는 경우가 많이 생긴 것 같아요. 좋은 것은 물론 우리 걸로 가져와야 되지만 기존의 한국여자농구만의 장점을 좀 더 살려봐야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박 : 조금 다른 얘기긴 한데, 남자농구도 2014년 아시안게임에서 우승을 하고 그 다음에 역시 지속적인 하락세를 보여주고 있는데요. 프로농구가 원년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KBL이건 WKBL이건 용병제도가 있었잖아요. 혹시 용병제도가 대표팀, 그리고 일반 선수들의 전반적인 경기력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김 : 그래서 여자농구는 용병제도를 잠시 폐지했었던 적도 있었는데요. 외국인 선수가 있다라는 것 자체로 그렇게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여자농구와 남자농구는 좀 다른게 남자농구는 외국인 선수 2명을 뛰게 하면서 외국인 선수의 비중이 크잖아요.
어떻게 보면 50%까지도 차지를 하는데, 이런 부분들은 확실히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데 여자농구에 있어서는 한 명 정도는 시너지효과를 가져오고, 또 외국인 선수를 잘 뽑음으로 인해서 그 팀이 우승할 확률도 많이 있기 때문에 로테이션이 되면서 우승을 해야 제가 보는 시청자 입장에서는 그런 것들이 재미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박 : 그런데 말씀과는 다르게 활동하셨던 우리은행 팀이 최근 몇 년간 압도적인 승률로 독주를 이어가고 있잖아요. 로테이션이 잘 안되고 있어요.
김 : 네 (웃음) 그래서 재미가 없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 것 같아요.
박 : 예전에 마치 배구에서도 삼성화재가 계속 이겼듯이 이게 장단점이 확실히 있습니다만 첫번째로 우리은행의 독주 요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그리고 얼마나 이런 독주가 이어질 수 있을지?
김 : 독주는… 우선 엄청난 훈련량인 것 같아요. 남자선수, 여자선수가 조금 다를 수도 있는데, 여자선수들은 자기 몸에 배어있는 것들이 경기 중에 긴장해야하는 상황이 있으면 그 상황에 있어서 내가 해야할 역할을 못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근데 이게 내 몸에 배어있는 거면 긴장을 하는 상황에서도 그 동작이 나오는데, 이 동작을 만드려고 굉장히 많은 훈련을 하거든요. 정말 기본적인 것부터 매일..
“하루에 훈련하는 시간이 9시간, 10시간 이렇게 되는데, 제가 마지막에 감독님과 했던 1년은 하루도 쉬지 않았거든요. “
그러다보면 훈련량이 길어질 수 밖에 없고, 하루에 훈련하는 시간이 9시간, 10시간 이렇게 되는데, 제가 마지막에 감독님과 했던 1년은 하루도 쉬지 않았거든요. 심지어 토요일, 일요일뿐만 아니라.. 그래서 지금 몸에 배어있는 것들이 계속 나오고 있고, 작년 시즌에도 그런 체력과 정신력과 여러가지 요인들 덕분에 이기지 않나 싶습니다.
박 : 해설을 하실 때, 아무래도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우리은행 경기를 해설하실 때에는 같이 안타깝고 하는 마음도 있을 것 같아요. 물론 안타까운 상황은 많이 없었지만 (웃음). 그래도 보시면서 그런 마음이 좀 들죠?
김 : 아니요. 저는 전혀 그런 마음 하나도 없고요. 우리은행 감독님 봬도 항상 말씀드리는게 좀 제발 져주시라고.. 그래야 여자농구도 재밌어지고 그런다고 말씀드리기는 하는데, 저는 우리은행 편을 들고 싶지도 않고 다른 팀들 선수들이 전부 잘해가지고 경기 자체가 재밌는 경기로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타미카 캐칭 선수 같은 경우는… 팀이 안될 때에는 자기가 ‘우린 이렇게 해야된다’ 제시를 하면서 저희 인식 속에 심어줬고, 운동할 때도 제일 솔선수범 하면서 슬라이딩을 하거나 허슬플레이를 많이 보여주는.. 저렇게 대단한 선수도 매사에 저렇게 훈련을 하는구나 느끼게 해주면서 많은 시너시 효과를 가지고 온 것 같아요.”
박 : 앞에서 잠시 용병선수에 관한 말씀을 하셨는데요. 예전에 WKBL에 세계에서도 탑급 선수들이 왔었쟎아요. 이유도 잘 모른체 (하하). 팬 분들도 왜 여기서 뛰고 있지 할 정도로. 아무래도 그런 분들이 와서 플레이하면 선수들이 자극이 될 것 같아요. 그 분들을 통해서 실제로 선수들의 기량이 향상되는 경우가 좀 있나요? 아니면 그 포지션이 아예 사장화되버려가지고 부정적인 영향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김 : 저는 더 좋은 영향이 많다고 느껴요. 작년에 은퇴했지만 WNBA에서 거의 탑플레이어였던 타미카 캐칭 선수와 거의 4시즌 동안 같이 했었는데요. 물론 어떤 외국인 선수들은 와서 딱 운동만 하고, 게임만 하고 가는 선수들도 있어요.
타미카 캐칭 선수 같은 경우는 저희들이랑 하나가 되기 위해서 노력을 했고 쉬는 시간에도 같이 함께 활동하고, 팀이 안될 때에는 자기가 ‘우린 이렇게 해야된다’ 제시를 하면서 저희 인식 속에 심어줬고, 운동할 때도 제일 솔선수범 하면서 슬라이딩을 하거나 허슬플레이를 많이 보여주는 것들이 저희가 저렇게 대단한 선수도 매사에 저렇게 훈련을 하는구나 느끼게 해주면서 많은 시너시 효과를 가지고 온 것 같아요.

박 : 단순히 경기력 외에도 선수로서 기본적인 태도나 정신들이 자극이 됐었군요. 다음으로 김은혜 선수가 우리은행에서 프로선수 시절을 전부 보내셨잖아요. 특별히 이유가 있었나요? 그게 참 궁금합니다.
김 : 우선은 첫번째 FA가 됐을 때, 24살이었는데요. 제의를 받았을 때가 제가 한창 올라설 시기였고, 다른 팀들에서도 백지수표까지 준다고 하면서 오라고 했는데, 저는 딱 한 가지였었던 것 같아요. 제가 경기를 많이 뛰지 못하던 초년생 때 타미카 캐칭 선수가 우리나라에 와서 같이 우승을 했었어요.
그땐 제가 경기를 많이 뛰지 못할 때였고, 그리고 나서 2년 정도를 다른 외국인 선수가 왔었거든요. 근데 제가 FA 계약하는 시즌에 캐칭 선수가 다시 오기로 했다고 해서 그 선수와 다시 같이 뛰고싶었어요. 가족들과 많은 얘기를 통해서 다른 팀 가는건 어떻겠냐라는 얘기를 많이 했는데, 그냥 그 선수랑 같이 뛰고싶다는 생각 그거 하나만으로 있었던 것 같아요.
박 : 물론 우리은행에서도 충분히 보상을 해줬겠죠? (웃음).
김 : 근데 저희 팀에도 워낙 좋은 선수들이 많아가지고 많은 보상은 못 받았어요 (웃음).
박 : 캐칭 선수도 그 사실(본인 때문에 우리은행에 남은 것)을 알고 있나요?
김 : 잘 모르겠어요.
박 : 이번에는 선수 이후의 커리어 개발에 대해 여쭤보고 싶은데요. 은퇴 후에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계시잖아요. 근데 해설위원이 선수로 활동했을 때 목표는 아니였을 수도 있다 생각이 드는데, 그때부터 해설위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으셨나요?
김 : 아뇨. 전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그런 제의는 들었어요. 아나운서 분이 ‘나중에 은퇴하면 해설위원 하셔야죠?’ 이렇게는 말씀하셨는데, 전혀 해설위원이 목표라거나 그런건 없었는데, 우연치 않게 제가 미국 테네시 대학을 다녀와서 기회가 돼서 해설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박 : 겸손한 대답이시네요. 본인이 선수였을 때, 그 당시에는 은퇴 후에 무엇을 해야겠다 이런 생각을 구체적으로 해본적이 있으신가요?
김 : 그런 것 또한 생각을 못해봤던 것 같아요. 구체적으로 어떤 목표를 가지고 했던 건 아니지만 운동을 그만두면 지도자가 되거나 아니면 저 같은 경우는 선수를 하면서 아무래도 미래에 대한 것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교육대학원을 가서 교원자격증을 받아서 학교 쪽에서 일해볼까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거지 딱 구체적으로 내가 뭐가 되야겠다 이런 생각은 안 했던 것 같아요.
박 : 선생님은 스타플레이어셨는데 그 외에 다른 선수 분들도 비슷하실 것 같아요. 선생님은 사실 굉장히 주목을 받는 분이셨음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구체적 계획을 선수 시절부터 갖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거든요. 다른 선수 분들도 비슷하겠네요?
김 : 우선 환경적으로 그게 쉽지 않거든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매일 그 많은 훈련을 해야되고 학교를 갈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많이 그렇게는 못하고 있는데, 그래도 최근에는 미래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는 친구들이 많이 생기면서 자기계발에 힘쓰는 친구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예요.
“은퇴를 하고난 바로 직후에는 사실 앞으로 내가 뭐를 해야될지 고민만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부터 막 찾기 시작했어요… 근데 저는 사실 모험 같은 걸 두려워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어요. 새로운 거에 대한 도전이 너무 두렵고 내가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가졌었는데, 막상 한 번 해보고 나니까 재밌고 그런거예요.”
박 : 그런 분들에게 선생님이 되게 좋은 롤모델 같을 거예요. 왜냐하면 정부에서 하는 국제스포츠 인재양성 과정도 수료하셨고 테네시 대학에서 어학연수도 갔다 오시고, 이런 과정들이 사실 궁금한 분들도 계실거예요. 어떻게 연수를 받고, 어떻게 갔다 오시고, 또 그런 방법들은 뭐가 있었는지. 이 영상을 보시게 될 분들이 선수 분들도 계실 수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김 : 은퇴를 하고난 바로 직후에는 사실 앞으로 내가 뭐를 해야될지 고민만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어느날은 은퇴를 하고나서 정말 남들처럼 방에서 티비를 보면서 과자를 먹으면서 누워있는데,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부터 막 찾기 시작했어요.
무작정 인터넷을 뒤지면서 뭐를 해야되나에 대해서 찾다보니까 마침 (당시에) 체육인재육성재단에 프로그램들이 있더라고요. 그 프로그램을 딱 보고나서 이런걸 해보는게 어떨까 싶었어요. 근데 저는 사실 모험 같은 걸 두려워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새로운 거에 대한 도전이 너무 두렵고 내가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가졌었는데, 막상 한 번 해보고 나니까 재밌고 그런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처음 시작은 여성스포츠 리더양성 과정을 시작했고, 영어 과정도 했고, GPS(국제스포츠인재양성)과정, 뿐만 아니라 테네시 과정까지 하면서 매사에 새로운 도전을 하면서 이런 것들이 내게 재미로 다가오다 보니까 ‘나도 할 수 있구나’ 이런 마음을 가진 것 같아요.
박 : 그러면 영어를 초급(기초)부터 들으신 건가요?
김 : 네
“제가 처음에 영어 시작할 때 진짜 인터뷰뿐만 아니라 제 이름 정도 말할 수준밖에 안 됐어서 초급에서부터 중급 배우고, 테네시 다녀오고나서 되게 감사하죠.”
박 : 이게 보통 의지로 될 수 있는게 아닌데 대단하시네요.
김 : 교수님도 아시겠지만 제가 처음에 영어 시작할 때 진짜 인터뷰뿐만 아니라 제 이름 정도 말할 수준밖에 안 됐어서 초급에서부터 중급 배우고, 테네시 다녀오고나서 되게 감사하죠.
박 : 테네시 대학에선 어떠셨어요?
김 : 우선 테네시 대학에서 제일 많이 얻은 거라고 말할 수 있는 건 농구에 대한 열정? 다시 한 번 농구에 대한 열정을 가질 수 있었던 점? 제가 은퇴를 할 때는 정말 농구가 약간 싫어진 기분도 없잖아 있었거든요. 농구를 다시 보고싶지 않은 마음? 근데 테네시를 가서 모든 사람들이 농구를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박 : 그게 학교내에 동아리 같은 서클 게임에 나가신거죠?
김 : 네
박 : 국가대표까지 하신 분이 일반인들과 섞여서 (웃음)
김 : (웃음) 저보다 잘하는 친구들도 많았어요

박 : 아주 좋은 시간이었다라고 느낌이 오네요. 그런 과정들을 모르는 선수들이 사실 굉장히 많은 것 같아요. 그런 부분들을 앞으로 기회가 되시면 설명을 많이 해주셔서 선수들의 자기계발에 꼭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네요.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선수들이 은퇴 후의 준비를 잘 못하고 있다고 하셨잖아요. 본인이 느끼시기에 엘리트 선수들이 (특히 여자농구 선수들이) ‘은퇴 후에 무엇을 해야겠다’, ‘내가 은퇴를 하기전에 무슨 준비를 해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는 선수들이 분명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선수들이 은퇴를 준비하면서 가장 필요한 점이 무엇인 것 같나요?
김 : 제가 생각하기엔 목표성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은퇴를 하고난 뒤에 ‘나는 어디 농구 센터를 만들어서 농구를 가르칠거야’, ‘결혼해서 애기 낳고 화목한 가정을 꾸리며 살거야’ 이런 친구들이 있거든요. 대부분 그런 삶을 살고 있고, 왜냐하면 어떻게 가야 될지 모르니까 그렇게 살다보니 현실에 안주하면서 살게 되는데, 자기가 가진 목표가 예를 들어 ‘정말 나는 영어를 배우고싶어’ 최근엔 이런 친구들이 많이 있어요.
농구는 영어가 기본으로 되어있는 용어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선수들이 ‘은퇴후에 나는 무조건 어학연수를 갈거야’ 이런 친구들이 굉장히 많이 있거든요. 그런 목표를 가지고 내가 영어를 배워야겠다 하면 정말 확실하게 배우든지, 내가 지도자가 되어야겠다 싶으면 지도자 쪽으로. 이렇게 자기가 가진 목표에 대해서 방향을 가지고 가는게 중요한데 이렇게 가다 저렇게 가다 하다보면 이도저도 안되는 상황들도 많은 것 같더라고요.
“운동이 정말 좋으면 공부도 어쨌든 현재 병행해서 가야하는 시스템이 있기 때문에 내가 운동을 하기 위해서 공부를 해야된다는 생각을 가지면 조금 더 목표성이 뚜렷해지지 않을까… 또 미국에 있는 튜터링 센터를 여러 번 방문했었는데요. 선수 출신들을 따로 튜터들이 붙어서 공부 시켜주고 그런 시스템을 가지고 운영을 하더라고요… 우리나라에도 그런 시스템이 도입된다면 선수들이 운동하는 시간 외에 공부를 혼자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는데, 다른 일반 학생들이 아르바이트 비슷하게 선수들에게 공부를 가르쳐주는 식으로 한다면 서로간에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박 : 최근 C0룰이 생기고 있는데, 이게 학점 미달로 출전하지 못하는 선수들도 반드시 생길 것 같아요. 이런 점에서 공부하는 선수를 만들기 위한 가장 좋은 정책이 뭘까요?
김 : 굉장히 어려운 질문인데 공부라는 것 또한 자기의 노력인 것 같아요. 운동하는 것도 자기의 노력인데, 운동이 정말 좋으면 공부도 어쨌든 현재 병행해서 가야하는 시스템이 있기 때문에 내가 운동을 하기 위해서 공부를 해야된다는 생각을 가지면 조금 더 목표성이 뚜렷해지지 않을까…
박 : 그 외에도 미국 테네시 대학도 다녀오셨으니까 혹시 이런 정책은 우리가 하면 정말 좋겠다 하는 아이디어가 있으신가요?
김 : 저희가 미국에 있는 튜터링 센터를 여러 번 방문했었는데요. 선수 출신들을 따로 튜터들이 붙어서 공부 시켜주고 그런 시스템을 가지고 운영을 하더라고요. 물론 테네시라는 학교가 체육이 워낙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시스템이 따로 있었는데, 우리나라에도 그런 시스템이 도입된다면 선수들이 운동하는 시간 외에 공부를 혼자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는데, 다른 일반 학생들이 아르바이트 비슷하게 선수들에게 공부를 가르쳐주는 식으로 한다면 서로간에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박 : 그렇게 우리나라에는 튜터링 시스템이 되고 있는 학교들이 없죠? 어려운 문제는 아닌데 좀 안타깝네요. 선생님께서 해설위원이시지만 이후에도 꿈이 있으실 것 같은데, 지도자라든지 스포츠 행정가라든지. 지금 이후에 꿈을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김 : 꿈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거창할 수 있는데, 그냥 항상 그랬던 것 같아요. 어릴 때는 제 꿈이 농구 국가대표, 국가대표 BEST 5 이런 꿈들을 항상 가지고 자랐는데, 어떻게 보면 제가 전주원 코치님이나 박정은 코치님이나 변연하 선수 같이 그렇게 대단한 스타플레이어는 아니었지만 조금은 목표로 했던 것 만큼 가기 위해서 항상 노력을 했었던 것 같아요.
지금 그걸 어느정도 이뤘다고 표현하기 좀 그렇지만 이룬 시점에 있어서 지금은 농구라는 게 너무 좋기 때문에 이런 재미있는 스포츠를 다른 친구들한테 좀 알려주고, 지금 하고 있는 일과 연관해서 아이들한테 농구를 가르쳐주고, 재미를 느끼게 해주고, 또한 더 나아가서 지도자도 꿈꿀 수도 있겠지만 아직 한국의 현실상 여자 지도자가 많지 않기 때문에 계속 제가 노력을 하고 이쪽에서 길을 가는게 중요할 것 같아요.
“자기가 가고자하는 길에 대한 목표가 확실히 있다면 저는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다고 믿어요… 저 또한 아무 것도 모르는 운동만 하던 선수였었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은퇴 후에 이런 과정을 밟아가고 갈 수 있다라는 건 저 또한 생각을 못했고.. 제가 했다고 하면 모든 선수들은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정말 얼마만큼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이런 부분들이 어렵지 않고, 두려움을 버리고 도전한다는 생각을 가지면 좋을 것 같습니다.”
박 : 굉장히 겸손한 말씀을 하시는데, 아까 말씀하신 기라성 같은 선배님들 말고도 선생님께서는 일단 은퇴 후에 자기계발과 선수 이외의 삶을 살아가는 데에는 제가 볼 때는 정말 큰 롤모델이 아닌가 싶어요. 물론 선수로서도 굉장히 훌륭한 롤모델이지만. 그래서 굉장히 겸손한 말씀을 하신다 생각이 드는데요. 지금 농구뿐만 아니라 운동을 하고, 고단한 일상에서 힘들어하고 있는 그런 분들에게 앞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상황상 어떻게 보면 사치일 수 있어요. 그런 분들에게 조금 힘이 될 수 있는 말씀 한 마디만 부탁드릴게요.
김 :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그런 자기가 가고자하는 길에 대한 목표가 확실히 있다면 저는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다고 믿어요. 왜냐하면 저 또한 아무 것도 모르는 운동만 하던 선수였었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은퇴 후에 이런 과정을 밟아가고 갈 수 있다라는 건 저 또한 생각을 못했고, 저희 부모님도 공부를 어릴 때 그렇게 안좋아하더니 왜 이렇게 공부를 하냐며 말씀하시기도 했는데, 제가 했다고 하면 모든 선수들은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정말 얼마만큼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이런 부분들이 어렵지 않고, 두려움을 버리고 도전한다는 생각을 가지면 좋을 것 같습니다.
박 : 마지막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지금이 내 농구인생의 몇 쿼터이다. 그리고 앞으로 나는 내 인생의 경기에서 몇 점을 더 넣겠다. 황당한 질문이지만 마지막 질문 드리고 싶습니다.
김 : 지금이 제 농구인생에서 3쿼터 초반? 우선 2쿼터가 끝난 뒤에 좀 쉬잖아요. 쉬고난 뒤에 3쿼터를 시작해야 되는데 그때 기선제압이 또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지금 3쿼터 초반에 확실히 쉬고 돌아온 뒤에 힘을 발산해야되는 그 시점에 있어서 기선제압을 해주고, 그 다음에 제가 한 경기 3점슛 7개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한 10개? 30점? (웃음)

“농구가 너한테는 전부일지 모르겠지만 네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김 : 항상 제가 농구를 하면서 농구가 저한테는 전부였었거든요. 슬럼프도 많이 있었고 힘든 시기도 많이 있었지만 농구가 저한테는 전부였었기 때문에 제가 다치면서 운동을 못 할 때 굉장히 많이 힘들었을 때 누군가 저한테 ‘농구가 너한테는 전부일지 모르겠지만 네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라고 말을 해줬는데, 그 말이 저한테 굉장히 와닫더라고요. 저의 인생에 있어서 농구는 정말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었고, 또 그걸 앞으로도 계속 좋아할텐데요. 여러분들도 앞으로 농구를 좀 좋아해주시고, 특히 여자농구 많이 사랑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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