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RI=김귀혁, 유한결 기자] 현영민. 이름 석자만 들어도 웬만한 축구 팬들은 그를 알아본다. 2002년 월드컵 멤버로서, 또 이들 중 가장 마지막으로 은퇴했으며 그 과정에서 본인만의 개성 넘치는 플레이로 기억을 각인시켰다. ‘롱 스로인’과 ‘경운기 드리블’은 그의 상징과도 같았으며, 측면에서의 활발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은퇴 이후에도 현영민은 해설위원이라는 길을 택하며 그만의 또 다른 매력을 대중들에게 뽐내고 있다. 선수 출신이 해설하는 것이 뭐 그리 특별한 일인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선수 출신 해설위원이 월드컵이나 아시안게임 등 굵직한 대회에서 주로 활동하는 반면, 그는 무려 4시즌 동안 K리그 현장을 누비고 있다.
스포츠미디어 시리는 서울의 한 카페에서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만나자마자 자연스럽게 주먹 인사를 건네며 유쾌한 인터뷰를 예고했다. 직업적 특성인지는 몰라도 인터뷰 내내, 마치 해설을 듣는 것처럼 나도 모르게 경청하고 말았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해설위원으로서 승승장구하는 그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Q. 유년 시절의 현영민이 궁금하다. 어떤 과정에서 축구선수를 하게 된 것인가.
동네에서 친구들하고 축구하는 것을 좋아하다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반 대항 축구대회에서 당시 축구부 감독님 눈에 띄어서 들어갔다. 그런데 그때 당시에는 구타가 있다 보니까 맞아가면서 해야 하나 싶은 회의감이 들어서 안 하다가, 5학년 때 감독님이 바뀌고 다시 축구를 너무 하고 싶어서 지금까지 이어지게 됐다.
Q. 부모님 반대는 크게 없었나.
부모님도 크게 반대는 안 하시고 지지해주셨다.
Q. 그러면 축구선수로 만들어준 그 반 대항 시합 전에는 축구선수라는 꿈은 없었던 것인가.
굳이 축구선수가 아니고 운동선수 특히 야구선수를 하려고 했다. 집에서 아버지가 축구공 농구공 야구공 등등 여러 종목의 장비를 사주셨는데 그중에서 축구는 그냥 공만 있으면 되는 거였고, 또 당시 학교에 야구부가 없었고 축구부만 있었다. 그래서 어렸을 때 저녁마다 지하도 밑에서 출입구를 골대 삼아 친구들끼리 모여서 한 것이 축구를 시작한 계기다.
Q. 그런 소년이 국가대표가 되었으니 그때 당시에도 눈에 띄었을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초등학교 때는 많이 왜소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 할 때까지도 너무 왜소해서 부모님이 보약이나 스태미나에 좋은 개소주, 뱀 같은 보양식을 어려운 형편에도 뒷바라지해 주셨는데 그게 도움이 됐는지 키도 커지고 피지컬도 좋아졌다. 원래 뛰기는 잘 뛰었는데 힘이 약했기 때문에 대학교 때 프로에 가기 위해 그런 부분에 맞춰서 훈련했다.
Q.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포지션은 같았나.
이게 운명인지 왼쪽 풀백이나 윙어를 주로 봤고, 그렇게 되면서 오른발잡이임에도 왼발도 오른발과 비슷하게 양발잡이가 됐다. 아무래도 왼쪽 측면 위아래 공격과 수비를 모두 하다 보니까 이게 익숙해져서 프로까지 오게 됐다.
Q. 보통 축구를 중고등학교 때 그만두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어떻게 극복했는가.
고등학교 때 사실 운동 외적으로 선배들과의 관계 같은 것이 있어서 그만두려고 했다. 그런데 나중에 되니까 선배들 때문에 그만두는 게 너무 억울하기도 해서 당시 상황들을 이겨냈던 게 대학까지 진학할 수 있었다.
대학교 입학해서는 3학년에 이영표 선배, 4학년에 김영철 선배 등 워낙 기량이 뛰어난 분들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킥, 드리블, 헤딩, 태클 등 각 분야에서 잘하는 선배들의 기술을 보고 훈련하면서 내 것으로 흡수하고자 했다. 예를 들어 내 드리블을 7이라고 치면 10에 가기 위해 이영표 선배를 따라 하거나, 킥에서도 왜 이 형은 킥을 잘할까 하면서 생각하고 반복했던 게 내 것으로 하나씩 만들어졌다.
그 과정에서 롱 스로인이나 코너킥, 프리킥 등 여러 가지 역할을 하니까 밖에서 봤을 때도 건국대 저 선수는 혼자서 운동장 이곳저곳을 왔다 갔다 하네 하면서 스카우트들 눈에 띄었나 보다. 그때 당시에는 윙백이 롱 스로인이나 좌우에서 코너킥이나 프리킥을 처리하는 경우가 많이 없다 보니까 그런 것 같다. 또 이런 특징들이 대표팀에 가게 된 계기 중 하나가 되지 않았나 싶었고, 대학교 1학년 때부터 피지컬적인 부분들이 성장하면서 이때 프로로 가기 위한 준비를 많이 했다.
Q. 그렇다면 롱 스로인을 위해 따로 훈련했던 것인가.
처음에는 워밍업 과정에서 10m 정도 거리 두고 어깨랑 허리를 피려는 목적으로 재미 삼아 시작했는데 던지다 보니까 남들보다 많이 나갔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그렇게 잘 던지는지 몰랐는데 대학교 1학년 때 10m 거리 두고 던졌는데 한 번에 날아가길래 재미가 붙어서 차츰차츰 거리를 늘려가면서 나중에는 40~45m 정도를 던졌다.
그 이후로 롱 스로인을 잘하기 위해 어떤 근육을 쓰고 기술적으로 뭐가 더 뛰어나야 할까 생각했다. 측면수비수다 보니까 스로인을 많이 해야 하는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그렇게 해서 실제로 감독님도 롱 스로인을 하나의 전술로 만드시며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킥하고 드리블에 강점이었던 측면 수비수로서 롱 스로인도 도움이 더 되겠다 싶은 생각이 시작이었다.
Q. 이러한 과정에서 대표팀의 부름이 있었다.
대학교 4학년 때 우연히 올림픽 대표팀 소속으로 A대표팀과 평가전을 대구에서 두 차례 했다. 아마추어 선수들끼리는 당시에 현영민 하면 롱스로인 잘하고 킥 좋고 드리블 좋은 선수로 알았는데, 그때 프로였던 선배들이나 A대표팀에서는 이런 내 모습에 놀라셨다. 하프라인에서부터 롱 스로인으로 포백 라인을 무너뜨리고 코너킥이나 프리킥도 직접 처리하면서 공격 가담도 활발히 해서 눈에 띄었나 보다.
다음날 차두리 선수, 그리고 다른 한 명과 같이 회복훈련 하고 있었을 때 훈련하는 장소로 감독님이 통역관분이랑 같이 오셨다. 왜 똑같이 훈련 안 하냐고 물어보셔서 감독님이 회북훈련을 시키셨다고 말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됐다. 평가전 때 내 모습에 대해 어떤 점이 좋았고, 보완해야 할 점은 무엇인지 등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주시고 가셨다. 이후 두 번째 평가전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당시 올림픽 대표팀 감독님이셨던 최진환 감독님이 경기 끝나고 저녁에 내일 대표팀 숙소로 합류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대표팀에 들어갔다.
Q. 그러면 대표팀에 들어가게 된 것이 당신만의 독특한 플레이 스타일이 한몫한 것 아닌가.
선수별로 특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팬분들이 현영민 하면 롱 스로인을 많이 떠올리는데 사실 이거 하나로 대표팀에 가기에는 쉽지 않다. 그거는 남들이 잘 사용하지 않은 롱 스로인을 보고 좋은 기술을 가졌다고 더 부각돼서 그렇게 느끼셨을 것이다. 롱 스로인 외에도 측면에서의 크로스나 데드볼 상황을 자신 있어 했고, 이런 것들이 합쳐지면서 대표팀의 부름을 받았을 것이다. 물론 경운기 드리블이나 롱 스로인 같은 특징이 선수별로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의 개발도 하나의 요인이었을 것이다.
Q. 특징 이야기나 나와 흥미롭다. 아무래도 요즘 선수들의 기술적 수준은 향상이 됐음에도 특징이 애매한 선수들도 분명 있다. 그런 부분에서 봤을 때 각 선수만의 특징을 개발하기를 권하는 편인가.
그렇다. 드리블, 킥, 헤딩, 피지컬 등 여러 가지 골고루 발달한 것도 좋지만 개인이 개인을 제압하기 위한 가장 첫 번째는 우월함이다. 킥이 우월해서 기성용처럼 공격수들이 뛰면 공이 나에게 온다고 생각하는 능력이 있다던가, 스피드가 빠르다거나, 스피드가 조금 느린 대신 90분을 여러 곳에서 뛸 수 있는 체력이 있는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이러한 개개인만의 특징을 가지는 것은 그 선수가 볼을 가졌을 때 무엇인가 기대를 하게 만들고, 프로 선수라면 그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스트라이커한테는 이 선수한테 크로스를 올리면 득점할 것 같고, 측면에서의 크로스는 이용이나 김태환, 홍철, 설영우, 강상우 등 이 선수들이 볼을 잡으면 뭔가 기대를 하게 하는 선수들이 축구 팬분들이 보기에도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보자마자 특징이 딱 떠오르는 선수들이 많이 나와야 하고, 개발해야 하고, 또 이런 선수들이 K리그 무대에서 더 좋은 평가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Q. 지금 생각해보면 2002년 월드컵 때도 선수별로 각자 특징이 뚜렷했던 것 같다. 월드컵 멤버 중에서 누가 가장 개성이 강한 선수로 기억하는가.
그때는 김남일 선배가 터프가이로서 우리나라에 많지 않았던 유형의 수비형 미드필더라서 기억이 난다. 아니면 유상철 선배처럼 멀티 포지션으로서 팀이 원하면 공격, 미드필더, 수비까지도 볼 수 있는 선수도 있었다. 그런 면에서 한 명 꼽으라고 한다면 유상철 선배님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모든 포지션에서 다방면으로 유능한 능력을 갖췄기 때문에 이런 선수라면 어느 감독이라도 다 선호하지 않았을까 하는 선수셨다.
Q. 사실 2002년에 발탁은 됐지만, 경기에 뛰지 못하는 5명 중 1명이었다. 조금 서운했을 법도 하다.
그 당시에는 준비하는 과정을 포함해 조별 예선에서 토너먼트까지 거치면서 어느 정도 주전이 정해져 있었다. 결국 4강까지 가면서 주전선수 포함 18명이 경기를 치렀고, 3ㆍ4위전에 내심 기회를 주시지 않을까 하는 마음은 있었다. 선수로서 목표가 국가대표가 되는 것이지만, 더 나아가서 월드컵에 경기를 뛴다는 것은 엄청난 자부심 아닌가.
그런데 나뿐만 아니라 경험이 많은 선배들도 못 뛴 경우가 있었고, 사실 서운함보다는 감사함이 크다. 2002년 다시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그런 현장에 내가 23명의 멤버로서 거의 20년 가까이 됐는데도 이 세대들을 추억해주시기 때문이다. 또 당시에 아마추어 선수로서 내노라하는 선배들이 많았음에도 외국인 감독님께서 나를 발탁 해주셨고, 경기는 뛰지 못했지만 같이 부딪치면서 훈련하고 경험한 것들이 자산이 되면서 아마 선수 생활을 오래 할 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한다.
Q. 사람들이 2002년 하면 월드컵을 많이 기억하지만, 아시안게임도 있었다.
내 나이대가 주축이 되어서 나갔던 대회고, 월드컵이 끝나고 바로 자국 부산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 전력상으로도 금메달을 따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다. 월드컵 때 코치진으로 계셨던 당시 박항서 코치님도 감독을 맡아주시면서 기대도 엄청났고 그래서 너무 아쉬웠다.
자국에서 열렸던 아시안게임에 축구 붐이 일어났던 상황이었고, 그 대회에서 우승했다면 더 많은 축구 팬들이 기억해주셨을 텐데 하는 마음이 있다. 특히 준결승전에서 승부차기에 떨어졌을 때가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현장이나 라커룸은 정말 그곳에 있어 보지 않으면 못 느낄 분위기였다. 누구 하나 입 떼기가 어려울 정도로 참담한 심정이었고, 선수들도 실망감이 너무 컸다. 특히 이동국, 김은중, 박동혁 등 여러 내 친구들도 함께했었던 대회라 더욱더 아쉬웠던 것 같다.
Q. 그때가 월드컵 직전이어서 금메달 못 따는 게 이상하다는 여론이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다. 와일드카드도 월드컵 멤버인 이운재, 이영표 선배랑 갔었고, 당시 아마추어 신분에서 잘한다는 선수들이 다 모여있는 상황이어서 그런 아쉬움이 지금도 매우 크다.
[SIRI INTERVIEW-현영민②] 한국인 최초 러시아 프리미어리거가 들려주는 그 당시 이야기에서 계속
김귀혁 기자(rlarnlgur1997@siri.or.kr)
[21.08.12 사진 = 스포츠미디어 SIRI, KFA 공식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