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RI=정재근 기자] ‘스톤을 던진 순간, 컬링 인생이 시작됐다’
“아이스하키인 줄 알고 시작했어요.” 영문도 모른 채 링크장으로 간 박종덕은 얼떨결에 컬링을 시작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체육 선생님께서 선수 제안을 하셨고, 아이스하키를 하는 줄 알고 따라간 그는 처음으로 컬링을 마주했다고 한다. 그의 눈엔 ‘퍽’이 아닌 ‘스톤’이 굴러다니고 있었고, 큰 돌이 굴러다니는 게 신기했던 그는, 호기심에 시작했다가 지금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컬링이 뭔지도 몰랐던 박종덕이기에 금방 그만 둘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현재 한국에 몇 없는 실업팀에서 주장으로서 또 스킵으로서 팀을 이끌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의 팀은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우승하고, 범대륙 컬링 선수권 대회에서 수상을 할 만큼 세계적으로도 강한 팀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렇다면 그에게 선수로서 성장하면서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누가 있을까.
“(김)수혁이형이 가장 먼저 생각이 나네요.” 김수혁은 현재 경북체육회의 스킵이다. 한국에 컬링이 지금처럼 알려지기 전, 즉 한국 컬링의 첫 선수라고도 할 수 있다. 경상북도 출신이었던 박종덕은 컬링을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김수혁과 함께 길을 걷게 됐다. “주변에 배울 사람이 없었다면 안 했을 거 같은데, 저한테는 수혁이형이 있었네요(웃음),” 라며 그때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김수혁이 특별히 조언을 더한 건 아니지만 비슷한 또래가 곁에 있었다는 것이 고등학생 박종덕에게 큰 힘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 때로는 ‘촌놈’처럼 생겼다며 박종덕을 놀리면서도 훈련을 하기 시작하면 진지한 모습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또한, 부모님도 빼놓을 순 없다. 컬링은 팀 스포츠이다. 따라서 개인 훈련을 하는 데는 한계가 있고, 팀원들과 함께 합을 맞춰보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당시 박종덕이 살고 있던 곳은 영양이다. 훈련이 이루어지던 대구와는 무려 자차로 3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이 거리를 함께 동행해준 사람이 바로 그의 부모님이다. 먼 길이지만 그에게 꿈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부모님께서는, 묵묵히 그와 함께 동행했다. 그때 헌신적인 부모님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박종덕도 우리가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박종덕은 운명처럼 컬링을 시작했지만, 결코 쉬운 길은 아니었다. 컬링이란 스포츠 자체가 대중적이지 않았기에 훈련 환경도 열악했고, 스스로 끊임없이 동기부여를 해야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김수혁을 포함하여 다른 동료들과 부모님의 헌신적인 지원이 있었고, 덕분에 그는 컬링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그렇다면 컬링 선수로서 처음으로 성취감을 느낀 순간은 언제였을까? 박종덕은 2005년 토코로 주니어 태평양선수권 대회를 떠올렸다. 당시 한국 컬링은 국제 무대에서 존재감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대반전이 일어났다. 바로 박종덕이 속한 한국 대표팀이 금메달을 획득한 것이다. “그때 기분이 아직도 생생해요. 지금 생각해도 벅차오르네요. ‘이 맛에 운동하는 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때를 회상하는 그의 눈에는 많은 감정이 교차하는 듯한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도전은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3년 연속 메달을 획득하며, 한국 컬링이 계속해서 잘해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캐나다에도 전지 훈련을 가며 많은 경험을 쌓아갔다. 이 경험들을 발판으로 더 성장하고 더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이후에도 그의 컬링 인생은 마냥 꽃길이 아니었다. 그는 당시 있던 경북도청과 계약이 끝나고 그는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평범하게 대학을 다니며 군입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어느 날, 자취방에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바로 현재 국가대표 감독이자 의성군청 남자팀의 코치인 이동건과 김수혁이었다. “종덕아, 벤쿠버 동계올림픽까지만 다시 해보자.” 이미 박종덕이 합류할 것이라는 가정하에 팀을 짠 것이었다. 이동건과 김수혁의 뜻을 굽히지 못한 그는 군입대를 미루게 됐다. 하지만 실업팀이 없던 그들은, 비실업팀인 부산컬링협회 소속으로 컬링 인생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부산에는 컬링장이 없다. 하나 있는 빙상장에서 훈련을 한 것이다. 빙상장이 문을 닫는 22시부터 새벽 3시까지 연습을 이어갔다.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제한이 있었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다. 올림픽만 생각하며 기본기만 다지는 그들이었다.
간절한 바람에도 현실은 냉정하기만 했다. 2009년, 벤쿠버 동계올림픽 진출이 좌절되고, 박종덕은 입대를 했다. 군대에서 그는 다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컬링 선수 박종덕’이 아닌 ‘교수 박종덕’으로서의 새로운 길을 준비했다. 그렇지만 제대를 한 후, 김수혁은 그를 또 다시 불렀다. 계속해서 컬링 선수로서의 커리어를 쌓고 있던 김수혁은 다시 선수 생활을 제안했다. 박종덕은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어쩌면 마음 한 켠에는 컬링 선수로서의 생활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들어가게 된 팀이 현재의 강원도청이고, 박종덕은 지금도 그 자리를 지켜오며, 이제는 스킵으로서 중심에서 팀을 이끌고 있는 핵심 멤버가 됐다.
그렇게 그가 컬링을 한지 20년이 넘었다. 그는 10년 전과 현재 본인을 비교해달라는 말에 고민 없이 ‘멘탈’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너무 어렸죠,”라며 말문을 열었다. 서로가 본인이 컬링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거기서 나오는 자부심이나 철학도 선수별로 강했기에 힘든 순간들이 많았다고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때의 박종덕이 있었기에 지금의 박종덕도 있을 수 있다고 말하는 그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컬링이 단순한 기술 싸움이 아니라 팀워크와 심리전이 핵심임을 깨달았다.
“컬링은 저한테 ‘과제’라고 말할 수 있어요.” 박종덕이 말하는 ‘컬링’이다. 하지만 그 과제는 ‘즐거운 조별과제’라는 설명을 더했다. 빠르게 끝내는 것이 아닌 팀원들이 힘을 합쳐야 결과물이 나오기 때문이다. 많은 시간과 경험을 요구하는 만큼, 거기서 오는 성취감이 남다르다. “컬링은 ‘천재’가 나오지 않아요.” 이어 “매년이 과제이고, 저한테는 계속 학교를 다니고 있는 느낌을 줘요,”라며 컬링을 표현했다. 그에게 컬링은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다. 끝없는 배움과 도전의 연속이며, 팀원들과 함께 풀어나가는 평생의 과제이다.
그렇기에 그는 지금도 컬링을 연구하고, 팀원들과 함께 더 나은 경기를 위해 끊임없이 고민한다. 단순한 경기 승패를 넘어, 팀이 함께 성장하는 과정 자체가 가장 큰 의미라고 말하는 그에게 컬링은 이미 인생 그 자체다.
이제는 팀의 주장으로서, 그리고 한국 컬링을 대표하는 선수로서 더 큰 무대에서 도전하고 싶다는 욕심도 내비쳤다. “컬링은 저한테 끝이 없는 과제예요. 그 과정을 계속 즐기면서 더 멀리 가보고 싶어요.”
어느덧 컬링을 시작한 지 20년. 아이스하키인 줄 알고 처음 스톤을 만졌던 소년은 이제 대한민국 컬링의 중심에 서 있다. 그리고 그는 오늘도 빙판 위에서 새로운 과제를 풀어나가고 있다.
1편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다. 처음 스톤을 잡은 순간부터 주니어, 비실업팀으로서의 도전 그리고 이어지는 새로운 팀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2편에서는 7년만에 국가대표로 복귀한 박종덕 그리고 다시 맞이한 결정적인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스포츠미디어 시리(Sport Industry Review&Information)
정재근 기자(jjk8869@naver.com)
[25.03.02. 사진 = 스위퍼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