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RI = 권소현 기자] 야구는 ‘기록의 스포츠’다. 하지만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그 기록은 한자(漢字)를 모르면 완벽히 해독하기 어려운 ‘암호’에 가까웠다. ‘자살(刺殺)’, ‘보살(補殺)’, ‘병살(倂殺)’…
1905년 미국 선교사에 의해 전래됐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일본 야구의 영향을 깊게 받은 한국 야구는 그 용어 속에 오랜 시간 ‘언어의 잔재’를 안고 있었다. 이는 단순히 낡은 표현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음 세대의 팬들에게는 야구를 즐기는 데 높은 장벽으로 작용했고, 우리 프로야구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스포츠에서 모국어는 단순한 소통 도구를 넘어선다. 그것은 팬과 선수를 잇는 가장 직관적인 다리이자, 그 스포츠를 우리 문화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핵심 고리다. KBO(한국야구위원회)가 ‘한글 야구’를 위해 걸어온 길은, 곧 ‘그들만의 리그’에서 ‘모두의 야구’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이었다.
한자 도배된 기록지, ‘팬심’이 바꾸다
오랫동안 KBO 리그의 공식 기록지는 한자로 채워졌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당시 신문, 법조문 등 사회 전반이 한자를 병기하던 문화를 따랐고, 동명이인을 구분하는 데 용이하다는 실무적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한글 세대가 사회 주류가 되면서 “한자를 몰라 기록지를 볼 수 없다”는 팬들의 민원과 언론의 지적이 쏟아졌다. KBO는 이러한 목소리에 응답했다.
가장 상징적인 변화는 2016년 3월에 일어났다. KBO 기록위원회가 그해 시범경기부터 모든 공식 기록지의 선수명과 야구 용어를 한글로 표기하기로 전격 결정한 것이다. 1982년 원년부터 34년간 이어진 관행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LG 트윈스의 두 ‘이병규’처럼 혼동되던 동명이인은 ‘9이병규’, ‘7이병규’처럼 이름 앞에 등번호를 붙여 구분하기로 했다.
당시 KBO 관계자는 “기록원들이 편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익숙한 것을 바꿔야 한다”면서도 “언론이나 일반 팬들이 보기 편하게 바꾸는 것이 사회 변화에 맞추는 길”이라고 밝혔다. 이는 KBO 리그가 더는 소수의 전문가나 ‘올드 팬’을 위한 것이 아닌, 누구나 쉽게 접근하고 즐길 수 있는 콘텐츠로 나아가야 한다는 선언적 조치였다.
‘방어율’에서 ‘평균자책’으로…우리말 찾기
기록지 표기 변경과 함께, 난해하거나 일본식 표현이 남은 용어 자체를 바꾸려는 노력도 병행됐다.
이미 2006년, KBO는 허구연 위원장을 중심으로 ‘야구용어위원회’를 꾸려 대대적인 용어 정비 작업을 추진했다. 이때 일본식 한자어인 ‘방어율(防禦率)’은 의미가 더 명확한 ‘평균자책(平均自責)’으로, ‘원정경기(遠征競技)’는 ‘방문경기(訪問競技)’로 다듬어졌다.
‘데드볼(dead ball)’이 ‘몸에 맞는 공’으로, ‘4구(四球)’가 ‘볼넷’으로 순화된 것은 성공적으로 정착한 대표적 사례다.
물론 모든 용어가 순우리말로 바뀐 것은 아니다. 2016년 기록지 한글화 당시, 뜻을 알기 어렵던 ‘자살(刺殺)’과 ‘보살(補殺)’은 각각 ‘풋아웃(putout)’과 ‘어시스트(assist)’라는 메이저리그식 용어로 변경됐다. 이는 순우리말 고집보다는, 일본식 잔재를 털어내고 팬들이 직관적으로 이해하며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표준화’에 초점을 맞춘 결과로 해석된다.
여전한 ‘외래어 남용’, 조용했던 한글날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KBO 리그의 ‘우리말 야구’는 아직 갈 길이 멀다. 2011년 국립국어원 실태 조사에서 지적됐듯, TV 중계방송에서는 여전히 ‘밸런스(균형)’, ‘스타팅(선발 선수)’, ‘와일드 피치(거친 투구)’ 등 불필요한 외국어와 외래어가 남발되고 있다. 10여 년이 지났지만 이 문제는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아쉬움은 올해(2025년)도 이어졌다. 지난 10월 9일 한글날, KBO 리그 차원의 공식적인 움직임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SSG 랜더스 등 일부 구단이 자발적으로 한글 유니폼을 입고 팬들과 그 의미를 되새겼지만, 리그 전체가 ‘야구 속 우리말’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캠페인이나 노력은 보이지 않아 씁쓸함을 남겼다. 2006년과 2016년의 의미 있는 변화를 주도했던 KBO이기에 그 아쉬움은 더욱 컸다.
스포츠의 미래는 결국 ‘다음 세대’의 팬들에게 달려있다. KBO 리그가 전 국민에게 사랑받는 스포츠로 굳건히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경기력 향상만큼이나 우리의 말과 글로 야구를 더 쉽고 깊이 있게 즐길 수 있도록 하는 환경 조성이 필수적이다.
‘평균자책’과 ‘몸에 맞는 공’의 성공 사례를 이어갈, 제2, 제3의 ‘한글 야구 용어’를 발굴하고 정착시키려는 KBO와 미디어, 구단의 꾸준한 관심이 다시 한번 필요한 시점이다.
스포츠미디어 시리(Sport Industry Review&Information)
권소현 기자 (so_hyu@naver.com)
[25.10.28, 사진제공 = Kt 위즈 공식인스타그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