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RI=김귀혁, 유한결 기자] 현영민. 이름 석자만 들어도 웬만한 축구 팬들은 그를 알아본다. 2002년 월드컵 멤버로서, 또 이들 중 가장 마지막으로 은퇴했으며 그 과정에서 본인만의 개성 넘치는 플레이로 기억을 각인시켰다. ‘롱 스로인’과 ‘경운기 드리블’은 그의 상징과도 같았으며, 측면에서의 활발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은퇴 이후에도 현영민은 해설위원이라는 길을 택하며 그만의 또 다른 매력을 대중들에게 뽐내고 있다. 선수 출신이 해설하는 것이 뭐 그리 특별한 일인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선수 출신 해설위원이 월드컵이나 아시안게임 등 굵직한 대회에서 주로 활동하는 반면, 그는 무려 4시즌 동안 K리그 현장을 누비고 있다.
스포츠미디어 시리는 서울의 한 카페에서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만나자마자 자연스럽게 주먹 인사를 건네며 유쾌한 인터뷰를 예고했다. 직업적 특성인지는 몰라도 인터뷰 내내, 마치 해설을 듣는 것처럼 나도 모르게 경청하고 말았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해설위원으로서 승승장구하는 그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SIRI INTERVIEW-현영민①] 찬란했던 월드컵부터 아쉬웠던 아시안게임까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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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이러한 아쉬움 속에 울산 현대에 입단하게 됐다. 울산 입단 과정에서도 당시 신인으로서는 굉장히 좋은 대우 속에 갔었는데, 월드컵 영향이 컸던 것인가.
전혀 상관없었다. 울산 입단은 대학교 4학년 3월에 이미 결정됐었다. 그때 3학년 마치고 4학년 올라가면서 드래프트에서 자유계약 시스템으로 바뀐 시기였다. 그래서 모든 구단이 자유롭게 계약을 맺을 수 있었던 상황에서 이미 내가 3학년 때 했던 활약을 바탕으로 한 평가들이 있었다. 4학년 들어가면서는 대학 선수로서 할 수 있는 유니버시아드나 동아시아 대표를 하고 있어서 영향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첫 대회를 마치고 울산 현대에서 자유계약으로 당시 계약 기간만큼 줄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계약을 제시해주시면서 이미 월드컵 이전에 팀은 결정된 상황이었다. 만약 내가 월드컵을 나간다고 했다면 국내가 아닌 해외 무대로 진출할 수 있었던 상황들도 있었을 텐데 이미 울산과 계약을 맺은 상태라 월드컵을 마치고 울산 현대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Q. 들어보니 해외 진출에 대한 의지가 꽤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결국 2006년에 한국인 최초로 러시아 무대에 도전했는데 그 과정에 관해 설명해달라.
2005년 7월경에 먼저 러시아 제니트에서 오퍼가 왔다. 여름 이적시장이었는데 당시 울산 주장을 맡고 있었고, 이적하게 되면 이적료 100만불 정도에 3년 계약으로 하는 정식 계약을 에이전트 통해서 보내줬다. 그래서 에이전트가 구단에 전달하니 현재 선수는 주장을 맡고 있고 팀에 중요한 선수라 여름에는 어려울 것 같다고 에이전트를 통해서 제니트 구단에 뜻을 전달했다.
그런데도 제니트 측에서는 여름에 와서 뛰어주기를 바랐고, 그 과정에서 구단은 대체자를 찾아야 하니까 더 많은 이적료를 요구했다. 그런데 상황상 울산이 우승에 도전했던 중요한 시기였기도 해서 남게 되었는데 다행히 2005년에 우승을 하면서 주장으로서 우승컵도 들어 올렸다.
그 사이에 2005년이 지나가면 자유계약 선수가 되었기 때문에 11월 중순쯤에 울산에서 재계약 요청이 들어왔는데 당시에 좀 정체된 기분을 받았다. 2002년 월드컵 다녀와서 2005년 초에 대표팀에 탈락하고 그 후 계속 못 뽑히면서 변화를 줘야겠다는 생각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감사하게도 병역 혜택을 받은 상황이라 해외 나가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
나이도 27살 정도라서 딱 도전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해서 결국 감독님께 전화를 드렸는데 감독님은 남아 달라고 해주셨지만, 새로운 도전에 대한 의지를 피력했다. 또 제니트 구단에서 감사하게도 7월에 계약이 안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오퍼를 줬다. 사실 그때 러시아는 나오는 사람은 있어도 들어가는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로 매우 춥고 너무 떨어져 있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도전을 안 하면 후회할 것 같았다. 그래서 과감하게 도전을 결정했고, 울산 역시 내 의견을 이해해주면서 해외 진출을 하게 되었다.
Q. 아무래도 러시아에서의 삶이 언어, 문화, 음식 등이 다르다 보니까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
당연히 어려웠다. 특히 언어에 대한 어려움이 가장 컸고, 내가 동양에서 오다 보니까 조그마한 나라라고 인식했다. 그래서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외국인 선수만 따로 식사를 차려주든가 하는 디테일함이 있었지만, 거기는 15명까지 외국인 쿼터가 되다 보니까 외국인 선수도 그냥 하나의 선수로만 놓고 동등하게 대우했다.
그러다 보니 적응하는 데 꽤 힘들었다. 대화할 사람도 많이 없고, 당시에는 그냥 운동장에서 열심히만 하면 된다 이런 생각이 있어서 문화적인 면에서도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쉴 때도 혼자만 쉬게 되고 어울리지 못하다가 나중에는 그라운드에서 열심히 하다 보니까 인정을 하더라. 한 아시아인이 체구가 크지도 않은데 훈련에 모든 것을 쏟아내고 경기도 진지하게 열심히 뛴다고 하면서 한두 명이 알아주다 보니까 그때부터 통역을 통해서 말을 걸어주고 경기장에서도 편하게 해주면서 적응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Q. 러시아의 추위가 한국과도 많이 다르지 않나.
거기는 추위가 좀 길었다. 여름도 물론 있긴 한데 우리나라가 11월 초중반부터 추워서 2월 말까지 간다고 치면, 거기는 9월 초중반부터 해서 3월 말까지 추워서 그런 부분에서 적응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좋았던 점은 제니트가 유에파컵도 참가하고 있었고, 유에파컵에서 실제로 경기를 치를 기회도 왔었다. 그래서 그때 당시에는 좋은 팀인지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까 제니트가 명문 팀이라는 것도 많이 와닿게 되어서 기간은 1년이었지만, 안 갔으면 후회했을 만한 시기다.
Q. 유에파컵 이야기가 나왔는데 당시에 득점까지 했다.
처음 갔을 때 감독님이 작전타임 보고 4-4-2 포메이션을 쓰면 나를 오른쪽 측면 윙어 역할, 그러니까 K리그에서는 내가 마크해야 했던 선수의 자리에 서기를 원했다. 내 비디오 영상을 보고 크로스에 장점이 있으니까 측면 돌파 이후 크로스를 많이 올리기를 선호했고, 그래서 무슨 자신감인지 해보겠다고 하면서 시즌 초반을 치렀다.
실제로 유에파컵 세비야전 당시 득점할 때도 오른쪽 측면 윙어 자리에서 세컨드 볼을 밀어 넣으면서 득점을 했는데, 사실 그 포지션에 가지 않았더라면 득점을 못 했을 것 아닌가.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도 운명이었다고 생각한다.
이후 1년 동안 오른쪽, 왼쪽 윙어나 풀백 등의 자리에서 멀티포지션을 소화했다. 그 과정에서 감독님도 아드보카트 감독님으로 바뀌셨고, 독일 월드컵 마치고 이호, 김동진 선수도 합류하면서 그때부터는 누군가 대화할 수도 있고 해서 편해졌던 것 같다.
또 결혼하기 전 지금 와이프랑 약혼식만 하고 급하게 해외로 넘어갔던 상황이라 서로 뭣도 모르고 갔는데, 나도 고생이었지만 아내가 정말 고생했다.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도 알지 못하고 나 혼자 믿고 갔으니 말이다. 만약에 해외 지방으로 원정을 가면 무서우니까 혼자서 불을 켜놓기도 했다. 그래서 마지막에도 전남에서 은퇴했는데 그때도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아이를 데리고 가서 생활해 줬으니 정말 감사하다.
Q. 러시아에서 지도방식이나 훈련이 한국과 비교해서 특별한 점은 없었나.
아마 훈련은 대부분의 나라가 비슷한 것 같다. 워밍업하고 코디네이션하고 패싱, 슈팅 게임하고 나머지는 자체 게임. 이거는 어느 나라 가도 훈련은 비슷하다. 다만 환경이 다르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월드컵 치르고 붐이 일어나면서 축구 전용구장도 많이 생겨났는데 당시 러시아는 너무 춥다 보니까 인조 잔디를 쓰는 팀도 꽤 있었고, 비행기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거리도 멀었다.
이러한 환경적인 것들 외에도 우리나라 팬분들도 굉장히 열정적이시지만 거기는 대다수분들이 열정적이셨다. 그래서 매우 추운 날씨에도 웃통을 벗으시는 분들이 많아서 경기를 열심히 안 뛸 수가 없는 분위기를 팬들이 만들어줬던 기억들이 있다.
또 요즘에는 모든 팀이 이런 부분에서 잘 되어있다. 피지컬 코치도 2002년만 해도 레이몬드 코치님이 계셨는데 이런 개념이 K리그 팀에는 생소했다. 그래서 이전에는 과학적으로 기록하는 시스템이 많이 없었는데 그 이후로는 각 팀이 피지컬 코치, 비디오 분석관 등이 잘 갖춰져 있어서 선수들이 발전하는데 긍정적이라고 본다.
Q. 인프라적인 부분에서 우리나라도 크게 밀리는 점이 없다는 말인가.
그렇다. 우리가 2002년 이후에는 좋은 월드컵 경기장에서 경기를 치렀지만, 그 전에 대학 시절에는 천연잔디라 해서 곳곳에 파인 곳도 많은 맨땅에서 연습했었고 인조 잔디도 많았다.
그런데 지금은 잔디에서 대학 선수들도 대회를 치르고 있고 고등학생들도 마찬가지다. 훈련도 프로 산하 유스팀들은 잔디에서부터 훈련을 지속해서 하다 보니까 그런 면에서 기량에 변화가 있다고 생각한다.
Q. 사실 그 당시 러시아는 잔디가 잔디라고 할 수 없을 만큼의 상태 아니었나.
맞다. 우리나라는 축구화 스터드가 고무로 된 것을 많이 신었는데, 거기서는 잔디가 파이는 쇠 스터드 축구화를 많이 신었다. 그런 축구화를 선호하지는 않았지만 경기장 환경 때문에 신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잔디 관리나 배수도 잘되어있고 일부 구단에서 여름철에 폭염 때문에 관리가 안 되면 누렇게 뜨는데, 해외에 비하면 잔디 관리는 엄청나게 잘 되어있는 편이다. 대구를 포함한 축구 전용구장도 마찬가지로 딱 12,000명이 몰입해서 볼 수 있는 경기장도 지자체에서 만들 계획을 하고 있어서 축구인으로서는 너무 기쁘다.
Q. 다시 러시아 이야기로 돌아오겠다. 김동진 선수가 오고 꽤 오랜 기간 활약하면서 현지 팬들도 기억에 남는 선수로 알고 있는데 적응에 있어서 도움이 많이 됐던 것 같다.
일단 적응이라고 하면 선수단 정보나 팀의 역사, 문화 같은 것들이 가장 컸다. 도시에서 활동할 수 있는 지리적인 면이나 운동장 안팎에서 내가 경험했던 것들을 공유했고, 이호나 김동진 모두 활발한 선수들이고 나이도 어려서 적응이나 흡수가 빨랐다. 그래서 이 선수단에서 주축이 누구고 어떤 스타일을 가졌는지 등에 대해 알면 호흡 맞추기도 편하고 훈련 외적인 시간에는 같이 시내에 나가서 카페에서 식사나 휴식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사실 국내 축구 팬분들이 김동진 선수랑 포지션이 겹치다 보니까 주전 경쟁에 밀리지 않았나 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내가 이 팀에 가기 전부터 그 포지션에서 이미 체코에 월드컵을 다녀온 선수가 있었다. 워낙 좋은 선수가 포진해있던 상황이었고, 그런데도 아드보카트 감독은 김동진 선수를 데려오면서 중용했고 나중에 그 선수가 시즌 마치고 떠나게 됐다.
그래서 포지션 경쟁자라기보다 동료로서 한국의 좋은 점을 알릴 수 있는 동반자였다. 여기에 동생들도 굉장히 적응을 잘해주고 한국의 위상을 높여준 것 같아서 선배로서 뿌듯한 마음도 있고 좋은 활약을 펼쳐줘서 고맙다는 생각도 든다.
Q. 박지성 선수도 프리미어리그에 최초로 진출하면서 길을 넓혔는데, 그런 부분에 있어서 역할을 한 것 같다.
내가 간 이후로 이호, 김동진, 김남일 선배, 오범석, 신영록 등의 선수들이 러시아에 진출했다. 만약 아시아인으로서 사고를 쳤거나 큰일이 있었으면 안 좋은 시선을 갖고 있었을 텐데 한국 선수들 특유의 투지 넘치고 열심히 하는 부분을 많이 사랑해주셔서 그 뒤로 여러 선수가 가지 않았나 생각한다.
[SIRI INTERVIEW-현영민③] 해설위원으로서의 현영민 “누군가에게 상처주고 싶지 않아”에서 계속
김귀혁 기자(rlarnlgur1997@siri.or.kr)
[21.08.12 사진 = 스포츠미디어 SIRI, 제니트 공식 S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