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RI=이수영 기자] 축구 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축구장 참사를 뽑는다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건이 있다. 바로 1989년 4월 15일 잉글랜드 셰필드 소재 힐스버러 스타디움에서 일어난 ‘힐스버러 참사’.

리버풀과 노팅엄 간의 FA컵 준결승 경기에서 과다 인원 입장과 통제 방치가 겹치면서 발생한 이 사건은 사망자 97명(공식)과 700명이 넘는 부상자를 야기한 비극 그 자체였다. 힐스버러 참사는 지금까지도 영국 역사상 가장 참혹한 경기장 참사로 축구팬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3일 전 4월 15일, 리버풀은 구단 공식 홈페이지와 SNS를 통해 참사 33주기를 추모하며 ‘힐스버러참사는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사건’임을 강조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토트넘 등 동료 구단들 역시 SNS를 통해 사건을 추모하기도 했다.

한편 힐스버러 참사를 단순히 관중들의 예기치 못한 밀집으로 인해 발생한 안타까운 사건 정도로 치부하는 건 옳지 못하다. 힐스버러 참사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으며, 이후 관계 당국의 처신을 볼 때 그들이 강도 높은 비난을 받아 마땅한 부분은 절대 적지 않았다.

더불어 리버풀은 1985년 5월 29일 벨기에 브뤼셀의 헤이젤 경기장에서 열린 유벤투스와의 유러피언컵 결승에서도 서포터들 간 싸움으로 인해 39명이 사망하고 454명이 부상당한 ‘헤이젤 참사’의 내력도 가지고 있었기에 이른바 ‘구단 불명예’를 쉽게 씻어낼 수 없었다.

이와 관련해 필자는 「월스트리트 저널」의 유럽 스포츠 담당 기자 조슈아 로빈슨(Joshua Robinson)과 선임 에디터 조너선 클레그(Jonathan Clegg)가 저술한 「축구의 제국, 프리미어리그」를 참고해 해당 사건의 전말과 이로 인한 축구 산업의 변화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기본적으로 힐스버러 참사는 당시까지 만연했던 ‘입석 관중석’과 ‘원시적인 건축 방식’, 그리고 ‘경찰의 오판’이 아울러 초래한 결과였다.

3시 경기를 앞두고 2시 30분과 40분 사이 짧은 시간 동안 약 5,000명에 달하는 팬들이 한꺼번에 몰리는 병목 현상이 일어났고, 이로 인한 사고가 우려된 경찰은 출구로 사용하던 일부 문을 개방했다.

이 문을 통해 수많은 관중이 입장하기 시작했고, 입석으로 향하는 좁은 터널에 모인 관중들은 서로를 밀기 시작했다. 경기장 상황을 몰랐던 뒷사람들은 앞 사람을 밀었고 결국 입석 앞쪽에서 참사가 일어나고 만 것이다.

원래 같으면 출구를 열지도 않고, 수용 한계에 다다르면 터널 출입을 막는 등 제대로 된 조치를 취했어야 하지만 이날 경찰은 그러지 못했다. 더군다나 당시 경기장에 있던 경찰과 직원들은 사건 이후 변명하며 사실 그대로 밝히지 않으려 했고, 오히려 부상당한 관중들을 돕는 것은 관중들이었을 정도로 사건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

힐스버러 참사가 일어나고 이로 인한 충격과 슬픔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힐스버러 참사 공식 조사 책임자로 임명된 재판관 피터 테일러(Peter Taylor)는 1990년 1월 조사 결과 보고서를 발표하며 영국 축구의 위태로운 상황을 폭로했다.

보고서는 관중석 철망 철거, 입석 전용 구역 축소, 관람석 전석 좌석제로의 점진적 전환을 포함하여 화장실 문제까지 해결책으로서 권장했다.

특히나 화장실 문제는 아스날을 현대 프리미어리그의 아스날로 만든 전 부회장 데이비드 딘(David Dein)이 그토록 강조했던 문제이기도 했다. 당시 딘에게 노후화되고 더러운 화장실은 이 축구란 스포츠의 잘못된 점 전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였다.

실제 딘은 테일러의 보고서를 보고 “테일러가 모든 걸 100% 정확하게 파악해 놓았더군요. 화장실에 이르기까지. 스타디움이 현대화되어야 한다는 점, 관람 경험을 개선해 주어야 한다는 점까지 꿰뚫어 보았어요”라고 말했다.

정부는 이런 테일러의 보고서에 맞게 축구장 내 입석 금지령을 내려 상위 디비전 소속 구단 전체에 1994-95 시즌 시작까지 전원 좌석식 경기장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구단들 입장에서는 경제적 딜레마가 갑작스럽게 닥친 상황이었다. 경기장 개조를 하게 되면 리모델링 비용뿐 아니라 결국엔 관중 수용 인원까지 줄기 때문에 수입원도 줄어드는 재정난에 휩싸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실제 이에 따라 다수 구단이 파산 위기에 처했다. 정부는 구장 개조 비용 일부를 보조해 주겠다고 했지만, 1부 디비전 구단들은 갑자기 발생한 이런 부족액을 상쇄할 수입원이 필요했다.

그들이 마련한 해결책은 다름 아닌 오래전부터 논의해 온 ‘텔레비전 중계권의 단독 협상’이었다. 중계권 수익을 하위 디비전과 나누기보다 자기들만 보유할 수 있다면 이번 상황과 같은 갑작스러운 자금 조달 격차를 메우는 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이 시점부터 영국 축구는 거의 10년 동안 빅 구단들이 탈퇴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이는 마침내 빅 구단들이 ‘공동의 비전 달성’을 위해 풋볼리그 회원 자격을 버리고 그들만의 리그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이 리그가 바로 우리가 오늘날 그토록 열광하는 프리미어리그다.

물론 힐스버러 참사와 테일러의 보고서만이 프리미어리그 창설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옳지 못하다. 더불어 프리미어리그의 창설 과정이 순탄했는지 묻는다면 그 답변 역시 ‘그렇지 않다’다.

풋볼 리그 탈퇴를 주도했던 빅5(아스날의 데이비드 딘, 맨유의 마틴 에드워즈, 토트넘의 어빙 스콜라, 에버턴의 필립 카터, 리버풀의 노엘 화이트)는 이전부터 풋볼리그의 아쉬움을 공유했다.

풋볼리그는 변화를 완강히 거부하고, 소위원회가 끝도 없이 이어지고, 답답할 정도로 상업적 노하우도 부족하다는 게 그들 의견이었다.

그들은 축구를 사랑하고 축구가 잘 되길 바랐기 때문에 축구의 구질서를 붕괴하고 축구를 현대화시키고 싶어 했다. 그들의 눈은 언제나 미국 NFL의 사업 방식에 가 있었고, 그들이 배운 가장 두드러지는 교훈이 바로 ‘축구단 보유로 돈을 벌 거면 텔레비전으로 벌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빅 구단들의 풋볼리그 탈퇴와 프리미어리그 창설의 배경에 있어 중계권이 차지하는 중요도가 얼마나 높았는지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힐스버러 참사와 테일러의 보고서가 이러한 움직임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안타까운 건 그 증폭제가 하필이면 ‘비극적인 참사’였다는 데에 있다.

세상의 다수의 새로운 법률이나 개혁은 아이러니하게도 부당하거나 참혹한 일말의 사건이 있어야 생성되곤 한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라는 속담도 유사한 맥락이다.

물론 프리미어리그 창설이나 축구 역사 속 수많은 사건의 시비에 대해서는 명확한 정답이 없다. 모든 게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명확한 점은 프리미어리그 같은 빅 구단들만의 리그 창설 움직임은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될 터었다. 이전의 영국 축구 산업 발전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말이다.

힐스버러 참사 33주기. 우리는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아픔의 역사를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이수영 기자(sdpsehfvls@naver.com)

[2022.04.18, 사진=리버풀 공식 인스타그램, 위키피디아, 네이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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