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RI=김귀혁 기자] 운에 대해 논할 때 사람들은 그것을 운 그 자체로 치부한다. 그러나 그 운을 살린다면 이는 실력으로 바뀐다.
4일 카타르 도하 칼리파 인터내셔널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0 아시아 챔피언스리그(이하 ACL) G조 조별리그 최종전 수원 삼성과 빗셀 고베의 경기에서 수원이 후반 김건희와 임상협의 골에 힘입어 2-0으로 고베를 누르고 16강행 막차에 올라탔다.
수원의 올해 ACL 전망은 좋지 않았다. 지난 2월과 3월 고베를 홈에서, 조호르 다룰 탁짐을 말레이시아 원정에서 맞이하여 모두 패배했다. 고베에 경기 종료 직전 실점을 허용했고, 한 수 아래로 평가받던 조호르에도 고전함과 동시에 높은 전력으로 평가받던 광저우 헝다와의 두 경기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16강 진출이 불투명해 보였다.
그러다 코로나 여파로 ACL이 중단되고, K리그를 모두 마친 11월에 중립국인 카타르에서 재개 소식이 들려왔다. 그 사이 수원은 대부분의 시간을 좋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시즌을 보냈다. 이임생 감독이 경기력과 성적 부진을 이유로 사퇴했고, 주승진 수석 코치가 감독 대행으로 팀을 이끌었으나, 결과를 내지 못하며 강등 위기까지 내몰렸다.
팬들의 민심마저 바닥을 치며 최악의 분위기를 맞이한 순간 변화를 꾀했다. 주승진 감독 대행이 물러나고 구단 레전드 출신인 박건하 감독을 선임했다. 팬들은 워낙 안 좋은 팀 상황 때문인지 기대감을 드러내면서도, 수원이 모기업의 변화로 구단 레전드 출신을 코치진으로 선임하는 이른바 ‘리얼 블루’ 정책을 펼쳐 온 것 대비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기 때문에 반신반의하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박건하 감독은 부임 후 첫 선수단 미팅 때 과거 수원의 영광을 떠올리며 “잃었던 수원의 정신을 일깨우자”라며 굳은 의지를 드러냈다. 이후 8경기에서 승점 14점을 따내며 강등 위기에서 벗어남은 물론, 5년 5개월 만의 슈퍼매치 승리로 팬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리고 시작된 ACL. 이미 2패를 떠안고 있던 시점에서 수원은 염기훈이 A급 지도자 강습회 참여로 명단에서 제외됐고, 한의권도 부상으로 카타르에 오지 못했다. 여기에 외국인 선수 4명 역시 부상과 계약 만료 등의 이유로 카타르 행 비행기에 탑승하지 못했다. 팀의 해결사와 정신적 지주, 수비 핵심까지 없는 상황에서 전망은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원에 희망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2차전에 맞붙은 바 있던 조호르가 코로나 19에 대한 안전상의 이유로 말레이시아 정부로부터 참가 불허 통보를 받았다. 이로서 기존 수원과 조호르의 2차전은 무효로 처리되었고, 경쟁자가 한 팀 줄어든 상황에서 3팀 중 2팀이 16강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에 상황 자체는 나아졌다.
그러나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김건희가 경미한 부상으로 나오지 못하는 상황에서 스트라이커 자원이 전무했다. 여기에 적극적인 귀화 정책으로 수준급 선수를 보유한 광저우 헝다를 2번 연속으로 만나는 일정이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수원의 마음가짐은 남달랐다. 지난달 22일에 펼쳐진 광저우와의 조별리그 경기에서 수원은 짜임새 있는 경기력으로 광저우를 괴롭혔고, 여기에 투지까지 더해지며 여러 차례 골문을 위협했다. 그러나 좋은 경기 내용에도 불구하고 공격수의 부재는 뼈아팠다. 11개의 슈팅을 때렸지만, 영점 조준에 실패하며 득점 없이 0-0으로 경기를 마쳤다.
이후 고베와 광저우가 향후 진행된 조별 예선에서 서로 1승 1패씩 주고받은 상황에서 1일에 펼쳐진 수원과 광저우의 조별리그에서 수원이 승리할 경우 16강 진출을 확정 지을 수 있었다. 그리고 수원은 지난 맞대결 때 보다 더욱 기민한 움직임을 보이며 사실상 반코트 게임으로 광저우를 압도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후반 8분 임상협의 골이 터지며 16강 진출을 눈앞에 둔 듯 보였다. 그러나 순간 수비에서 집중력을 잃으며 웨이시하오에게 동점 골을 허용했고 경기는 1-1로 마무리됐다. 광저우가 동점 골 이후 한 명이 퇴장당하며 유리한 상황을 맞이했던 수원이었지만 이번에도 공격수의 부재가 아쉬웠다. 무려 17개의 슈팅을 때려냈으나 골 장면을 제외하고 모두 골문을 외면했다. 김건희도 교체로 출전했지만 완전한 몸 상태는 아니었다.
이 경기 결과로 비셀 고베가 조 1위로 16강 진출을 확정 지었고, 광저우가 승점 5점, 수원이 승점 2점인 상황에서 수원은 무조건 고베를 2골 차 이상 혹은 3골 이상의 다득점으로 승리를 거두어야만 했다. 예상보다 선전하며 16강 진출 전망을 밝혔지만, 공격수의 부재 속에서 다득점은 쉽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수원에는 박건하 감독이 일깨웠던 ‘수원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6차전 고베와의 경기에서 초반 점유율을 내주는 듯했으나, 적극적인 압박과 전진으로 이에 맞섰다. 그리고 후반 시작과 동시에 김건희를 투입했고, 김건희는 코너킥 상황에서 헤딩으로 마무리 지으며 16강 희망을 이어갔다.
이후 후반 23분 코너킥 상황에서 고베의 수비수인 야스이 타쿠야의 핸드볼 반칙으로 페널티킥을 얻어냈고, 키커로 나선 임상협이 득점에 성공하며 2-0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이 두 골을 잘 지켜내며 수원은 불가능처럼 보였던 16강 진출을 확정 지었다.
이날 수원에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득점 이후에도 라인을 내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본인들이 잘 풀고 있던 패턴을 그대로 유지했고, 고베가 볼을 잡으면 바로 적극적으로 달라붙어 팀의 에너지 레벨을 유지했다. 이런 수원의 모습에 고베는 경기 후반에 접어들수록 패스 미스를 남발했다.
여기에 박건하 감독도 리얼 블루라는 명칭에 부합하는 모습을 이번 조별리그에서 보여줬다. 전술적인 짜임새뿐만 아니라 선수들의 위닝 멘탈리티와 자신감 등 구단의 정체성을 다시금 부여한 모습으로, 구단 레전드 출신의 감독이 보여줄 수 있는 선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이제 수원은 7일 오후 11시(한국 시각) H조 1위로 16강에 진출한 요코하마 마리노스를 상대한다. J리그에서는 중위권에 처져 있지만 독특한 전술 컨셉으로 리그 우승팀 전북을 압도했기 때문에 분명 어려운 상대다. 그러나 조별 리그에서도 세간의 예상을 뒤엎고 그들의 경쟁력을 보여준 수원이었기에 기대를 모으고 있다.
김귀혁 기자(rlarnlgur1997@siri.or.kr)
[20.12.05 사진=수원 삼성 블루윙즈 공식 S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