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롯데 자이언츠 / 故최동원 선수 10주기 헌화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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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RI=이영재 기자] 2011년 9월 14일, 한국 야구계의 큰 별이 졌다. 과거 한국야구를 대표했던 ‘무쇠팔 사나이’ 최동원이 53세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했다. 롯데 자이언츠의 홈구장인 사직구장 앞에는 최동원의 동상이 세워졌고 매년 이맘때면 추모 행사가 열리며 그를 기억하는 시간을 가진다. 그리고 올해, 무쇠팔 사나이가 우리 곁을 떠난 지 어느덧 10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최동원은 선동열과 함께 80년대를 이끌었던 투수다. 경남고와 연세대 재학시절부터 강속구 투수로 이름을 날렸으며,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대회에 나서 활약하기도 했다. 최동원은 프로 진출 이후에도 부동의 에이스로 타자들을 압도했다.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는 홀로 4승을 따내며 롯데의 첫 우승을 만들어냈다. 또한, 선동열과의 선발 맞대결은 영화로 만들어졌을 정도로 유명하다.

최동원은 선수협 결성을 이끌며 전면에서 선수들의 권리를 주장했다. 이 일로 구단의 미움을 받아 보복성 트레이드를 당했고 기량이 급격히 쇠퇴하며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비록 프로야구에서 그의 전성기는 길지 않았지만 짧은 기간 동안 남긴 임팩트와 한국 야구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부산을 넘어 전국구로

좌= 경남고 재학시절 / 우= 연세대 재학시절

최동원은 1958년 경상남도 남해군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입학 전 부산으로 이사를 갔고 초, 중, 고등학교를 모두 부산에서 나왔다. 최동원은 초등학교 때 축구를 먼저 시작했지만 5학년 때 야구로 종목을 바꾸게 된다. 이후 토성중(현 경남중)-경남고에서 야구부 활동을 하며 본격적인 야구의 길을 걷게 된다.

최동원이 전국에 이름을 알린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75년이다. 당시 서울에서 열린 제4회 우수고교초청야구대회에 최동원은 경남고 소속으로 출전했다. 경남고는 8강에서 경북고를 만나게 되는데 경북고는 불과 한 달 전 봉황대기 우승을 차지했던 당시 최강의 팀이었다. 최동원은 이런 경북고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게 된다. 경남고는 최동원을 앞세워 연이어 선린상고(현 선린인터넷고), 중앙고를 잡아내며 우승을 차지했다. 신문에 최동원의 이름 석 자가 대문짝만하게 실리게 된다.

3학년인 이듬해에도 최동원은 경남고의 마운드를 책임지며 청룡기 우승을 일궈냈다. 당시 1회전부터 결승까지 6일 동안 5경기를 모두 등판하는 괴력을 보이며 팀을 이끌었다. 이런 활약을 바탕으로 최동원은 전국 고교선수 최대어로 주목받게 된다.

원래 최동원은 고려대학교로 진학이 확정적이었다. (“『황금의 팔』 최동원 등 고대(高大)로 확정…” <동아일보> 1976.09.07, 8면.) 그러나 이후 돌연 연세대 소속으로 등록되는 일이 발생한다. 이 일로 논란이 빚어 최동원은 최우수고교선수 후보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후일담으로 당시 연세대 출신의 중앙정보부 직원들이 개입해 강제적으로 연세대에 입학하게 된 것으로 밝혀졌다.

최동원은 대학 시절에도 위력적인 투구를 보이며 전국구 스타로 군림했다.

한국을 넘어 세계로?

사진= KBS 스포츠 / 1981 애드먼턴 대륙간컵국제야구대회

당시 대학 선수 중 특출난 모습으로 최동원은 국제무대에 나서게 된다. 1977 니카라과 슈퍼월드컵, 1978년 이탈리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1981년 애드먼턴 대륙간컵국제야구대회 등 연이어 국가대표로 발탁됐다. 1981 대륙간컵 대회에서 최동원은 캐나다전 선발로 나서 8이닝 동안 퍼펙트를 기록하는 등 9이닝 1피안타 완봉승을 거두며 최고의 피칭을 선보인다.

국제무대에서의 활약으로 최동원은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눈에 띄게 된다. 그중 가장 적극적인 모습을 취한 팀은 토론토 블루제이스였다. 토론토가 최동원에게 구체적인 계약을 제시했고 합의에 이른다. 하지만 병역 혜택 이후 5년간 국내에서 선수로 활동해야 하는 규정과 여러 문제가 겹쳤다. 실제로 토론토의 선수 로스터에 등록되기도 했지만 결국 메이저리그 진출은 무산됐다.

당시는 정치적 입김이 크게 작용하던 시기였고 구단과 선수 간 상호 원활한 소통도 쉽지 않았다. 어쩌면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는 박찬호가 아닌 최동원이 됐을지도 모른다.

최동원은 1982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도 대표팀으로 선발됐다. 1982년은 국내에 프로야구가 출범한 해다. 실업야구에서 뛰던 많은 선수들이 프로야구로 넘어갔지만 최동원을 비롯해 김재박, 장효조와 같은 선수들은 그렇지 못했다.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하기 위해선 아마추어 자격을 유지해야 했고 이들의 프로 진출은 그만큼 늦어졌다. 최동원과 국가대표팀은 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해 프로야구 인기의 큰 촉매제 역할을 하게 된다.

아마추어 최강자의 프로 입성

롯데 자이언츠 입단 당시

최동원은 프로야구 입성 전 아마추어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았다. 1981년 대학 졸업 이후 실업야구 롯데 자이언’트’에 입단한 최동원은 입단하자마자 팀의 에이스로 낙점됐다. 최동원을 주축으로 한 롯데는 전기리그 우승을 거두며 실업야구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그리고 최동원은 한국시리즈 6경기에 모두 등판하는 대활약(이자 엄청난 혹사)으로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그는 1981년 최우수선수(MVP), 다승왕(17승), 신인왕으로 실업야구를 지배한다.

1983년, 최동원이 드디어 프로 무대에 발을 내딛었다. 그가 입단한 팀은 앞서 실업야구에서 인연이 있던 롯데 자이언’츠’였다. 롯데는 실업야구 시절 연고지가 없었지만 프로 출범 이후 부산을 연고지로 하는 팀이 됐다. 최동원은 학창 시절을 보낸 부산에서 프로 생활을 하게 됐다.


입단 첫해 성적은 예상보다 부진(?)하다고 평가받았다. 현재 기준으로 프로 첫해 선발투수가 위와 같은 성적을 기록했다면 당연히 좋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엔 현재 널리 쓰이는 WAR과 같은 세부스탯 개념이 전혀 없었고 투수의 능력을 가장 잘 표현하는 지표는 승/패였다. 당시 롯데는 전/후기리그 통합 승률 꼴찌인 최약체였다. 최동원이 아무리 잘 던져도 타선의 지원이 따라주지 않으면 좋은 승수를 올릴 수 없었다.

기본적으로 최동원에 대한 기대치가 매우 높기도 했다. 아마추어 야구에서 최강자로 군림했기에 실제로 평균자책점 11위는 다소 실망스럽다고 느낄 수 있다. 1983년 혹평을 받은 최동원은 절치부심하며 다음 시즌을 준비하게 된다.


1984년 최동원은 리그 최고의 선수였다. 다승, 이닝, 삼진, WAR 등 전반적인 지표에서 리그 최상위권을 기록했다. 최동원은 총 100경기 중 절반이 넘는 51경기에 출전했다.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리그에서 가장 많은 이닝을 소화했는데 이는 팀 내 2위(임호균, 161.2이닝)와 큰 차이가 났다.

최동원은 1984년 정규시즌 MVP를 수상하며 활약을 인정받았다. 투수 중에서는 독보적이었고 트리플크라운(타율-타점-홈런 1위)을 기록한 이만수가 유일한 적수였다. 하지만 이만수는 시즌 막판 기록 밀어주기 논란으로 기자들에게 외면받았고 최동원에게 표가 몰렸다.

이런 최동원의 활약을 바탕으로 롯데는 후기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게 된다. 전기리그 우승팀 삼성과 후기리그 우승팀 롯데가 맞붙게 됐다. 그리고 이 한국시리즈에서 전대미문의 기록이 나오게 되는데…

 

2편에서 계속

이영재 기자(youngjae@siri.or.kr)
[2021.09.12, 사진= 롯데 자이언츠, KBS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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